지치건 작가 (사진=김진부 미술평론가)

IACO GALLERY에서 12월 22일부터 31일까지 개인전을 하고 있는 지치건 도예가(b. 1954)를 만나 잠시 인터뷰했다. 독립운동가 조부와 얽힌 이야기와 현재 전시하고 있는 하모니 시리즈의 원래 시리즈명과 그 탄생 배경을 묻기 위해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그동안 공식적으로 공개된 바가 없어, 아트앤비즈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내용이다. 짧은 이번 인터뷰가 지치건 도예가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다음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 지치건 작가(도예가이자 현대미술가)의 탄생이랄까? 도예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의 아버님께서 젊은 시절에 만주(하얼빈)로 이주해 생활을 하신 적이 있다. 큰 할아버지께서 당시 '105인 사건'이라고,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당시 일가를 전부 다 몰고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하얼빈으로 이주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년이었던 아버님께서는 하얼빈 근처에 있는 큰 술독(사람 키를 넘기는 거대한 술 항아리)을 만드는 도자기 제조 기업에서 일을 하셨다. 당시 공장은 말이 50필 이상 있을 정도로 큰 회사였다. 아버님께서는 불도 직접 뗄 정도로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잘 하셨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마도 기술이나 관련된 일을 빠르게 익히셨던 것 같다.

제가 단국대학교 도예과(요업 공예과) 입학하고 나서야 아버님께서 이 이야기를 해주셔서 알게 됐다. 그래서 저는 은연 중에 (제가 도예 작가가 되는데) 아버지의 이러한 DNA가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대를 이어서 우리 딸까지 도예에 입문해서 지금 이렇게 도예가로서 3대째 이어 내려가고 있다.

지치건 작가 (사진=김진부 미술평론가)

■ 작가님의 대표 작품, 하모니 시리즈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작업을 하다가 잘 안돼서) 다시 작업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한 쪽으로 무심코 던졌는데, 그 모양이 (의미있게 느껴졌다.) 그 날은 현충일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들었던 생각은, 6.25 때 조국을 위해 산화한, 즉 몸바쳐...산 골짜기나 강이나 그런 곳에서 이렇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와 같은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명용사'라고 작품명을 지은 적이 있다. 그렇게 처음 탄생하게 된 시리즈가 하모니 시리즈다. 이후에 '무명용사'라는 이름보다는 하모니, 즉 입을 벌려서 노래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아서 제목을 '하모니'라고 짓게 됐다.

지치건 작가는 6.25 무명용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작가를 바라보면서 필자는 작가가 왜 작품명을 무명용사에서 하모니로 바꿨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치건 작가 (사진 = 김진부 미술평론가)

우리의 아들과도 같은 젊은 청년들의 죽음과 이름도 모른 채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참혹한 전쟁에 대해,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는 그 끔찍한 소리를 하모니로 승화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무심코 던지는 행위 속에서 우연하게 만들어진 '하모니 시리즈'는 의도하지 않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결과가 주어진 어린 청년들의 모습이다. 순수하고 맑은 눈빛은 비참한 전쟁이라는 광경을 바라보며 부르는, 그러나 탄환과 대포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는 하모니다.

필자는 하모니라는 작품이 6.25의 무명용사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큰 할아버지가 겪은 105인 사건(1911년)과 같은 제국주의 등 전쟁의 폭력에 죽음으로 항거한 모든 사람들의 하모니이기도 하다. 누명을 쓰고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고문을 겪다 사망하는 등 당시 말하지 못할 참혹한 일들을 겪은 남녀노소는 마치 '하모니 시리즈'처럼 각자의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총탄과 포탄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는 하모니는 지금도 전시되고 있다.

(아트앤비즈= 김진부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