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emin Chung There She was Found Pulled and Folded 1 2025 Bronze 323 x 94 x 145 cm (127.17 x 37.01 x 57.09 in)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Heemin Chung Photo: Jeon Byung Cheol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11월 21일부터 2026년 2월 7일까지 갤러리 1층에서 정희민의 개인전 《번민의 정원》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24년 타데우스 로팍 런던에서 열린 개인전 《움브라(UMBRA)》를 잇는 작가의 두 번째 갤러리 개인전으로, 신작 회화와 청동 조각을 선보인다.

특히 정희민 작가의 개인전과 동시에 갤러리 2층에서는 카탈루냐(Catalonia) 출신의 거장 호안 미로(Joan Miró, 1893–1983)의 개인전을 동시에 개최해 두 전시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가상과 물질이 교차하는 감각적 경험

정희민은 기술이 우리의 지각과 감각을 매개하는 동시대 환경 속에서 가상과 물질이 교차하는 감각적 경험을 탐구한다. 비물질적인 이미지를 손끝의 감각으로 더듬어 나가는 작가는 가상 세계를 통해 감응하는 일련의 풍경들을 회화적이면서도 조각적인 언어로 재구성한다.

Heemin Chung The Hour of a Black Petal 2025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100 x 73 cm (39.37 x 28.74 in)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Heemin Chung Photo: Jeon Byung Cheol


정희민의 회화는 바다의 파도, 조개껍질, 돌, 꽃, 나무껍질 등 자연에서 유래한 이미지들로부터 출발한다.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서 수집된 이미지는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통해 조작되고, 캔버스 혹은 투명한 겔 미디움(gel medium) 시트 위로 옮겨진다. 작가는 2017년부터 아크릴 안료의 보조제로 사용되는 겔 미디움을 조각적 재료로 확장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다층적 부조를 구현해왔다. 작가는 겔이 마르기 전 상태의 점성과 유동성을 이용해 표면 위에 주름과 층을 형성시키며, 이 과정에서 표면은 환영적 공간이 아닌 실질적인 부피감을 지닌 물질적 장으로 전환된다.

정희민의 작품은 '풍경화'

작가는 이러한 작업들을 ‘풍경화’로 여긴다. 수공의 물질과 디지털 데이터의 층이 축적된, 하지만 완전히 융합되진 않은 채 공존하는 이 표면은 유기적이면서도 인공적인 감각을 동시에 드러내며, 합성 플라스틱이나 데이터의 표면, 더 나아가 신체나 지질학적 단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지형적인 화면을 통해 작가는 물질적 기원에서 분리된 채 가상 공간 속에서 편평하게 소비되는 이미지들에 다시금 물질적 자율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Heemin Chung Your Angry Setting Sun 2025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117 x 80.5 cm (46.06 x 31.69 in)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Heemin Chung Photo: Jeon Byung Cheol


미술 평론가 문혜진은 이를 두고 “텍스처가 다른 회화 이미지와 겔 미디움이 조각조각 기워져 있는 불완전한 환영의 그림 평면은 가상과 실제가 분리 불가능하게 뒤섞인 혼합현실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번민의 정원, 디지털 시대 불안 은유

전시 제목인 《번민의 정원》은 스크린을 통해 인식되는 디지털 시대의 불안과 내적 동요를 은유한다. 정희민에게 ‘가상 공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인공 생태계이자,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이며 복제되고 변이하는 시뮬라크라의 정원과 같다.

Heemin Chung Spheres 2025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89 x 130 cm (35.04 x 51.18 in)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Heemin Chung Photo: Jeon Byung Cheol


작가는 “나는 인공과 자연을 분리된 세계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것도 결국 인공 세계 안에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자연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뒤엉킨 나뭇가지나 DNA의 나선 구조를 연상시키는 두 점의 청동 조각 <접히고 당겨져 1>(2025)와 <접히고 당겨져 2>(2025)는 작가의 회화에 드리워진 형태를 반향하듯 디지털 왜곡의 과정을 통해 구현된다. 이는 자연계와 디지털 시스템 모두를 지배하는 질서와 무질서의 긴장, 즉 증식·변이·엔트로피의 운동성을 시각화한다.

Heemin Chung Two Mouths Whispers 4 2025 Acrylic, gel medium and UV print on canvas 73 x 61 cm (28.74 x 24.02 in)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Heemin Chung Photo: Jeon Byung Cheol


정희민은 올해 초 서울 소재의 메종 마르지엘라 한남 플래그십에서 사운드 아티스트 조율과 함께 선보인 전시 《다른 곳, 레마, 열린 몸통(Elsewhere, Rhema, Open Torso)》에서 이미 이러한 ‘인공적 정원’의 개념을 탐구한 바 있다. 소리, 영상, 조각이 결합된 이 설치는 구리 및 청동의 유기적 형상들이 흘러내리며 만들어내는 감각적 밀림을 구현했다.

어떻게 제작했나?

정희민은 다각도로 촬영된 이미지를 결합해 물리적 대상이나 환경을 3D 모델로 재구성하는 기술인 사진측량술(photogrammetry)로 생성된 이미지를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이미지들은 작가에게 물질의 잔향을 머금은 채 떠다니는 파편과 같다.

그는 이 디지털 조각들을 다시 회화와 조각의 물질적 표면으로 끌어와 그 속에 잠재된 부피, 촉감, 밀도의 감각을 되살린다. 이 과정은 단순한 디지털 프로세스라기보다 비물질적 형상을 다시 손끝으로 빚어내는 ‘조각적 행위’에 가깝다. 이렇게 재구성된 형상은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작업 형태로 확장되며, 가상의 형상이 물질로 되살아나는 순간의 미세한 감각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는 “데이터화된 사물을 다시 전사와 캐스팅의 과정으로 물화하는 행위를 통해 복제와 증식의 상상적 공간을 열어낸다”고 말한다. 조개의 곡선, 부서지는 파도의 굴곡, 홈이 파인 나무껍질 등 작가가 선택하는 자연물들은 모두 뚜렷한 질감과 부피감을 지닌 것으로, 그가 사용하는 매체의 물리적 조건과 충돌한다. 이러한 형태적 긴장을 통해 구축된 화면은 평면으로 입체성을 표현하는 지점에서의 역설이 두드러지는데, 이에 대해 김진주 큐레이터는 “이차원을 위한 표면을 삼차원의 세계로 진입”시킨다고 설명한다.

19세기 낭만주의 숭고개념 재해석

정희민의 작업은 동시대 기술 환경에 대한 탐구이자, 동시에 19세기 낭만주의의 숭고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기도 하다. 영국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정의한 숭고는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함이 주는 두려움과 경외의 감정으로,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이끈 핵심 개념이다.

작가는 터너(J. M. W. Turner)의 회화처럼, 인간이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를 오늘날의 디지털 풍경 속에서 다시 호출한다. 무한히 확장되고 통제 불가능한 가상의 세계를 마주하는 경험을 신체적 감각과 정동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그는 디지털 시대의 숭고를 새롭게 정의한다.

《번민의 정원》은 이처럼 자연과 인공, 질서와 혼돈의 경계가 서로를 전제하며 공존하는 풍경을 그려낸다. 작가는 이질적인 세계와 감각들을 하나의 화면 안으로 견인해옴으로써 그 안에서 혼돈과 질서, 성장과 소멸, 통제와 유동성이 공존하는 동시대적 풍경을 펼쳐 보인다.

정희민 작가 소개

정희민은 한국에서 태어나 서울을 기반으로 거주 및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에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를 졸업했다. 작가는 두산아트센터(2023), 신도문화공간(2022), 뮤지엄헤드(2021),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2016)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인천아트플랫폼(2025), 웨스(2023), 서울 시립 남서울미술관(2021), 을지아트센터(2021), 수림아트센터(2020), 경기도미술관(2020), 레인보우큐브(2020), 플랫폼 엘(2019), 보안1942(2019),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2019), 하이트컬렉션(2018), 주홍콩한국문화원(2018), 아카이브 봄 (2017) 등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2022년 부산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선보인 정희민은 같은 해 제 13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두산아트센터(2023)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작가는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22), 신도 작가지원 프로그램(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2020) 등 다양한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그의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금호 미술관 등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타데우스 로팍과 함께한 그의 첫 개인전 《움브라》는 2024년 런던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2025년, 정희민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Line 2 아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메종 마르지엘라 한남 플래그십에서 조율과 함께한 2인전 《다른 곳, 레마, 열린 몸통》을 선보였다. 한편, 작가의 작품은 한불 수교 140 주년을 기념해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2026년 8월 29일까지 개최되는 기획전 《한국의 색, 한국 현대미술을 조명하다》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아트앤비즈=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