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김민정, Zip, 2025, 한지에 혼합매체, 69 × 100 cm
“‘Zip’은 서로 다른 두 요소가 맞닿아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지그재그 형태 속에서 이중성은 마침내 하나로 수렴하며, 그 과정 자체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불에 그을린 종이를 한 장 한 장 이어 붙이면, 상처를 감싸는 치유와 조화의 숨결이 피어난다.” — 김민정
갤러리현대는 김민정 작가의 개인전 'One after the Other'를 8월 27일부터 10월 19일까지 개최한다. 김민정은 동아시아의 서예와 수묵화 전통 그리고 동양 철학을 탐구하며 현대 추상화의 구성 어휘를 확장하는 작업을 30여 년 동안 지속해 오고 있다.
이번 전시는 2017년 《종이, 먹, 그을음: 그 후》, 2021년 《Timeless(타임리스)》 이후 갤러리현대와 작가가 함께 준비한 세 번째 개인전이다. 또한 2024년 프랑스 남부 생폴 드 방스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미술 재단 중 한 곳인 매그재단에서 개인전 《Mountain》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국내에서 선보이는 첫 개인전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불에 태워진 한지를 지그재그로 쌓아 올리며 두 개별적인 요소의 결합과 조화를 선보이는 〈Zip〉 연작 6점과 ‘아트바젤 바젤 2024’의 언리미티드 섹터에서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대형 작업 〈Traces〉가 국내 최초 공개된다. 이외에도 작가의 주요 연작까지 총 2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태우기, 반복이라는 명상적 행위와 종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통해 그동안 작가가 탐구해 온 물질성, 반복성, 그리고 우연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밀도 있게 보여줄 예정이다.
김민정의 작품은 한국의 전통 종이인 한지, 먹, 그리고 불 같은 가장 기본 재료를 통해 완성되며, 모든 작업이 반복과 절제를 통해 명상적으로 이루어진다. 한지 위에 겹겹이 쌓이는 먹과 불꽃의 흔적은 작가에게 무한한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재료이며, 자연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독창적이고 시적인 선이다. 재료를 일방적으로 사용하기보다 재료를 마주하며 극도의 통제와 우연적 과정의 공존에 귀 기울이는 과정은 관람자에게 정서적 치유와 명상의 의식을 환기한다.
[갤러리현대] 김민정, Blue Mountain, 2025, 한지에 수채, 75 × 144 cm
김민정은 한국 화단이 단색화와 민중미술이 대립하고 남성 작가들이 주를 이루었던 1980년대를 거쳐, 1991년 한국을 떠나 브레라국립미술원(Accademia di Belle Arti di Brera)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동양화 전공을 배경으로 말레비치, 클레, 로스코, 브랑쿠시 등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에게 매료되어 다양한 양식을 탐구하고 본인의 관심사와 접목한다.
매그재단 개인전 《Mountain》의 전시 서문을 쓴 큐레이터 앨빈 리(Alvin Li)는 김민정이 서구 모더니즘을 연구하며 1950년대 이후 동아시아권 실험미술의 계보를 계승하고 확장해 왔다고 평가하고, 김민정의 작품이 수묵 그 자체보다 더 수묵적인 혼성적 장면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전통 산수화의 화면이 높은 산과 곁에 물을 배치한다면, 김민정의 〈Mountain〉은 산과 물의 융합을 통해 양쪽의 본질적 통일성을 담아낸다.
전시 제목 《One after the Other》는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생성되는 연결성과 통일성,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이중성과 명상적 흐름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성찰을 내포한다. 고요하고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축적되며, 삶이 마치 ‘하나’ 다음에 또 ‘하나’의 순간들로 구성된 것처럼, 결국 ‘연결’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단절과 연속, 파괴와 생성, 개별과 전체라는 상반된 개념이 공존하는 지점을 탐구한다.
갤러리현대 1층 전시장에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신작 〈Zip〉 시리즈를 선보인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요소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Zip〉 시리즈는 불태우기, 반복되는 중첩, 그리고 종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통해 이중성과 통일성, 그리고 변형에 대한 그녀의 탐구를 계속 이어 나간다.
은은한 색감으로 염색한 한지를 길게 잘라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그 조각들을 층층이 겹쳐 지그재그 패턴으로 엮는다. 이러한 지그재그 패턴은 일종의 리듬감 있는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음새이자 꿰매어진 균열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의 조각은 고유한 존재이지만,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전체적인 의미를 완성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연결을 넘어 시간의 흐름과 관계의 형성, 그리고 이것이 겹겹이 쌓이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Zip〉은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환기하는 제목이다. 불태우는 행위는 파괴를 암시하지만, 조각들을 겹치고 정렬하는 과정은 치유를 의미한다. 두 조각을 하나로 모으는 이러한 행위는 ‘균열’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동시에 ‘회복’을 위한 상징적 제스처가 된다. 밝고 선명한 색의 종이는 그을린 어두운 가장자리와 대비되어 시각적 긴장감을 자아내고 작가의 손길 안에서 반복된 패턴은 치유의 시적 언어로 변화한다. 작가에게 한지는 색색의 물감이자 회화의 대상 그 자체이며, 명상과 수행을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한지를 태우고 겹겹이 쌓는 과정을 반복하며, 불꽃이 만들어낸 선으로 완성되는 그의 작품은 관람자에게 정서적 치유와 명상의 의식을 환기한다.
지하 1층에는 작가의 대표 연작 〈Mountain〉을 선보인다. 〈Mountain〉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다의 파도 소리를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에서 출발한 연작이다. 바다의 파도가 절벽에 힘 있게 부딪히면서 쌓여가는 소리가 겹겹이 얹히는 먹의 레이어로 표현되고,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연스럽게 고향 광주의 산을 기억하며, 작가 내면에 자리한 ‘산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의 재현이 아닌, 어린 시절 기억 속 자리 잡은 ‘산의 본질’에 가까운 이미지로, 한 폭의 시로 시각화된 광활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산과 바다가 대지라는 만물의 공통적이고 본질적인 토대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해 봤을 때, 바다를 표현한 것이 산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작가 작업 세계의 주요한 ‘명상, 순환, 통일성’과도 자연스레 연결되며 보는 이를 심연 깊숙한 세계로 안내한다.
[갤러리현대] 김민정, Traces, 2024, 한지에 혼합매체, 197.5 × 136 cm, 136 × 790 cm, 197.5 × 136 cm
〈Traces〉는 2024년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섹터 출품 이후 처음 공개되는 작품으로, 작가의 작업 중 가장 대규모로 제작된 설치 작업이다. 길이 8미터에 달하는 〈Mountain〉을 중심으로, 양측 벽에는 〈Mountain〉을 얇게 자른 뒤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이를 섬세하게 배열해 완성한 〈Timeless〉 두 점이 설치된다. 〈Timeless〉는 제목 그대로 ‘시간을 초월한(timeless)’ 존재, 바닷물결의 소리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작가는 두 연작의 물질적, 형식적 연계를 통해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반복적인 작업을 거쳐 추상적 지평선을 구축한다. 이는 시작과 끝의 경계를 지우는 순환의 개념을 보여주며,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반영한다.
2층 전시장에서는 ‘연결’과 ‘공존’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투명하고 중첩된 한지 조각들이 독립된 개체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서 형태로 드러내는 〈Encounter〉, 작고 연약한 존재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이를 가느다란 잉크 선으로 연결하거나 뻗어나가게 한 〈Predestination〉, 먹과 수채 물감이 서로 밀어내는 효과를 이용해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터지는 찬란한 순간을 연상시키는 〈Firework〉와 같은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 간의 연결과 시공간 속 찰나의 의미를 사유하도록 한다.
작가에 관하여
김민정은 1962년 광주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당시 남성 중심이었던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 작가의 한계를 체감한 그는 1991년 밀라노 브레라국립미술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밀라노에서 수학하며 작가는 한지에 안료가 스며드는 예측 불가능한 효과에 매료되어 수묵과 채색 추상화로 작업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2000년대에는 한지를 자르고 태우는 명상적이면서도 실험적인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회화의 전통을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김민정은 갤러리현대, 서울(2025, 2021, 2017); 매그재단, 생폴 드 방스(2024); 알민레쉬, 파리(2024); 노던하케갤러리, 멕시코시티(2024); 로빌란트+보에나, 생모리츠(2023); 갤러리코메티, 함부르크(2021); 폴커딜갤러리, 베를린(2021); 힐아트파운데이션, 뉴욕(2020); 랑겐파운데이션, 노이스(2019); 화이트큐브, 런던(2018); 광주시립미술관, 광주(2018); 에르메스파운데이션, 싱가포르(2017); OCI미술관, 서울(2015); MACRO 로마현대미술관, 로마(2012)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타이베이 비엔날레, 타이베이(2025); 제14회 광주비엔날레, 광주(2023); RISD미술관, 프로비던스(2022); 대영박물관, 런던(2019); 그리고 아시아소사이어티, 뉴욕(2018) 등 주요 기관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김민정의 작품은 폰다치오네 팔라초 브리케라시오, 토리노; 테이트모던, 런던; 대영박물관, 런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댈러스미술관, 댈러스; RISD미술관, 프로비던스 등 유수의 주요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