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실의 회화는 삶을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몸에 각인된 파동의 기억으로 다룬다. 개인의 경험은 그의 화면에서 곧바로 서사로 환원되지 않고, 자연의 현상과 겹쳐지며 감각의 층위로 확장된다. 이번 개인전 《파고》는 작가가 오랜 시간 응시해 온 출산의 경험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가 통과하는 결정적인 변곡의 순간들을 회화적으로 사유하는 자리다.

이은실 LEE Eunsil, 에피듀럴 모먼트 Epidural Moment, 2025, Ink and color on paper, 244 x 720 cm

(아라리오갤러리 사진제공)


대표작 〈에피듀럴 모먼트〉(2025)는 폭 7.2미터에 이르는 대형 화면 위에 출산 과정 중 경막 외 마취가 주입되는 순간의 환각적 감각을 펼쳐 보인다. 안개로 뒤덮인 산맥을 휘감는 용의 형상, 금빛으로 빛나는 비늘과 해체된 뼈의 흔적들은 통증의 소거와 감각의 과잉이 동시에 발생하는 특수한 신체 상태를 암시한다. 이 장면은 개인적 기억의 재현을 넘어, 삶의 중요한 국면 앞에서 인간이 겪는 정서적 마비와 각성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이은실 개인전 전시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사진제공)


〈멈추지 않는 협곡〉과 〈생사의 기로〉는 신체 내부의 분출과 확산을 용암과 협곡의 이미지로 치환하며, 생성과 파열이 공존하는 출산의 본질을 드러낸다. 푸른 안료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전운〉은 이내 닥쳐올 통증의 전조처럼 고요 속에 잠복한 소용돌이를 품는다. 한편 〈고군분투〉, 〈절개〉, 〈흔적〉은 출산의 순간 남겨진 상흔을 극도로 확대하여, 보이지 않도록 은폐되었던 신체의 기억을 정면으로 호출한다.

이은실 LEE Eunsil, 멈추지 않는 협곡 The Unstopping Gorge, 2025, Color on paper, 207 x 120 cm (아라리오갤러리 사진제공)

20대의 파고가 세계와 처음 맞부딪히는 급작스러운 충돌이라면, 30대의 파고는 선택과 책임이 축적된 끝에 도달하는 깊은 파동일 것이다. 이은실의 회화는 이러한 세대적 리듬을 특정 서사로 고정하지 않고, 모두가 통과하는 생의 물리적 조건으로 환원한다.

이은실 LEE Eunsil, 넘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태도 Mastitis, 2025, Ink and color on paper, 30 x 46.5 cm (아라리오갤러리 사진제공)


《파고》의 화면들은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이 겪은 기억을 자연의 순환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개인의 경험이 타인의 감각에 공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 이은실의 회화는 파고를 넘어서기보다, 그 안을 통과한 이후에야 비로소 도달하는 고요를 조용히 제시한다.

이은실 LEE Eunsil, 전운 Stage 1 of Labor, 2025, Ink and color on paper,
150 x 250 cm (아라리오갤러리 사진제공)

(ART&BIZ= 정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