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전통 회화와 조각 중심의 보수적 전시 경향을 유지하던 영국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 Main Galleries)는 오랜 세월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리듬을 지켜온 한 작가에게 거대한 문을 연다. 로즈 와일리 그녀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에 이어 여성 작가로는 두 번째, 그리고 영국 출신 작가로서는 최초로 로열 아카데미의 중심 무대를 단독으로 채우게 되는 이 사건은 단순한 전시 일정의 공지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감수성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리는 조용한 울림과 같다. 와일리는 젊은 시절 미술사에 편입되지 못했으나, 그 시간의 공백을 오히려 내면의 두께로 전환한 보기 드문 예술가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늦게 찾아온 명성이 아니라, 오래 축적된 감각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는그 순간의 문턱에 서 는 미술사의 묵직한 사건이다.

JARILAGER Gallery 사진제공


와일리의 화면에는 언제나 삶의 소리와 시간이 남긴 흔적이 묻어난다. 그녀의 선은 정확하거나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흔들리고 지워지고 다시 그어지며, 마치 기억의 표면 위에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살아 움직인다. 과장된 비율과 예상치 못한 색채는 단순히 ‘파격’의 전략이 아니라, 그녀가 사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다. 오래된 영화 포스터, 스쳐 지나간 사람의 뒷모습, 신문 속 단편적 장면, 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떤 순간들이, 와일리의 손끝에서 다시 조립되어 전혀 다른 생명력을 가진 풍경으로 변모한다.

"로즈 와일리의 회화는 완결된 장면의 재현이 아니라, 파편화된 기억들이 서로 교차하며 재탄생하는 미학적 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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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 아카데미 전시는 바로 이 ‘과정’에 대한 깊은 경의를 담는다. 그녀가 젊은 시절 주목받지 못해도 포기하지 않았던 긴 시간, 가족을 돌보며 잠시 화실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순간들,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쌓아올린 수많은 계절의 층위가 이번 전시에서 하나의 호흡을 이루어 관객 앞에 놓일 것이다. 그 속도는 느렸지만,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시간이다. 그래서 와일리의 작품이 대담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은, 그 안에 담긴 생의 온도 때문이다. 그녀의 붓질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오랜 시간 품어온 감정의 진동이자 존재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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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을 가로지르는 굵은 선과 갑작스러운 색의 비약, 제멋대로 튀어나오거나 비틀린 형상들은 그녀가 바라본 세계의 솔직한 형태이다. 그 불완전함은 미숙함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찰의 증언에 가깝다. 관객은 그녀의 작품 앞에서 무언가를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림의 호흡과 나란히 걸으며 자신의 기억을 환기 시킨다. 와일리의 회화는 보는 이와 함께 생각을 움직이고 감정을 흔들며, 오래된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힘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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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에서의 최근 전시가 그녀에게 새로운 시선을 가져다주었다면, 로열 아카데미의 전시는 그 모든 시간을 결속시키는 결정적 장면이 될 것이다. 지금 세계 미술계가 로즈 와일리에 열렬한 관심을 보내는 이유는 단지 독창적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기억과 시간, 감각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들을 회화라는 오래된 언어 안에서 새롭게 번역하고, 잊고 지낸 감정의 체온을 되살리는 방식으로 동시대 회화가 잃어버린 ‘인간적 깊이’를 다시 제안한다. 늦은 시기에 찾아온 명성은 그저 화제성의 결과가 아니라, 오랫동안 조용히 준비된 빛이 마침내 표면으로 떠오르는 여명黎明이요 희망의 빛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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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와일리는 늦게 피어난 꽃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그 표현은 그녀에게 맞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자신에게 적합한 속도로 피어난 작가다. 다시 말해, 그녀의 회화는 나이가 한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예술이 어느 지점에서든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2026년 2월 로열 아카데미는 새로운 미술세계의 역사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일 것이고, 관객들은 와일리의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알게 될 것이다. 창작의 시작은 언제나 지금이며, 그 지금은 누구에게든 다시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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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로즈 와일리는 지금,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특별한 자리에서 가장 온화하고 인간적인 빛을 내는 작가로 남는다. 그녀의 회화는 여전히 자유롭고, 한결같이 대담하며, 무엇보다 따뜻하다. 그리고 바로 그 따뜻함이,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다정한 빛처럼 오래 남을 것이다.

(ART&BIZ= 정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