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에서 삼원갤러리가 선보이는 개인전 〈봄을 찾아서〉는, 제목에서 이미 암시하듯 한 해의 끝에서 느리게 찾아오는 미세한 온도의 변화를 예고한다. 그 온기는 다름 아닌 흑연(Graphite)을 주재료로 삼아 ‘틈’과 ‘시간’, ‘현재’라는 거대한 주제를 탐구해 온 작가 권순익이 쌓아 올린 수십 겹의 어둠에서 배어 나온다. 그의 회화는 표면적으로는 추상에 가깝지만, 정신의 심층으로는 기도(祈禱)나 수행에 더 닿아 있다. 이번 전시는 그가 지난 수십 년간 밀도 높게 구축해 온 조형 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권순익의 작업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그의 재료관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어린 시절 문경 탄광촌에서 우연히 마주한 ‘흑연’—깊은 어둠 속에서 미세한 은빛을 품고 스스로 빛을 되돌려내는 이 재료는, 이후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그는 물감과 고운 모래, 미디움을 켜켜이 쌓아 올린 뒤, 그 표면을 긁고 벗기고 비벼내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미세한 틈을 ‘시간의 단면’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 틈에 흑연을 문지르는 행위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기억과 망각을 이어주는 일종의 철학적 몸짓으로 승화된다.
대표 연작인 〈틈–積·硏(적·연)〉 시리즈는 바로 이 ‘틈’의 미학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캔버스 위에 수십 번의 반복을 통해 색의 층을 올리고 또 갈아내며 만들어지는 고유한 시간성, 그 사이에 스며든 흑연의 은은한 반광은 화면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현재’라는 순간의 농도를 다시 측정하게 만든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과거 때문에, 혹은 지나간 행복 때문에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 때 비로소 현재는 완벽해진다.”
이 문장은 그의 예술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과도 같다
또 다른 주요 연작 〈無我(무아)〉에서는 점·선·면이라는 가장 단순한 조형 요소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화면을 구성한다. 흑연을 덧입힌 점들이 기하학적 이미지를 이루는 과정은, 마치 수행자의 호흡처럼 느리지만 확고하게 쌓여간다. 이는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자아를 비우고 현재라는 지점에 스스로를 내려놓는 감각적·정신적 프로세스다.
이처럼 그의 작업에서 ‘흑연’은 단순한 재료를 넘어 삶을 관통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빛을 가장 깊게 품은 어둠, 가장 고요하지만 가장 강한 존재감—흑연은 세상의 화려한 색을 대신해, 인간이 놓치고 살아온 시간의 결을 드러내는 매개체가 된다. 그 재료적 특성은 그의 회화가 지닌 정신성과 맞물려, 보는 이들에게 묵직하지만 따뜻한 울림을 남긴다.
권순익의 국제적 주목도는 단순한 트렌드의 결과가 아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베네수엘라 국립현대미술관(MAC), Museo de Arte del Tolima 등 해외 미술관들은 그 독창적인 재료성, 수행적 회화 방식, 서정적 추상미가 지닌 보편성을 높게 평가해 왔다. 색채와 조형성은 동양적이지만, 반복적 노동과 시간의 층위는 서구의 미니멀리즘·모노크롬 회화와도 유의미하게 대화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지역적 특수성을 넘어 국제적 보편성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최근 싱가포르·파리·스페인을 비롯한 국제 아트페어에서의 호평은 그 가능성을 다시 증명한다.
이번 삼원갤러리 전시는 이러한 권순익의 장기적 궤적을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자리다. 그는 한 해의 끝에서 봄을 이야기한다. 그 봄은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현재의 순간 속에서 피어나는 내면의 온도에 가깝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행위”—그의 흑연이 은은히 빛을 내는 이유는 아마 이 태도 때문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재료처럼, 그의 작업은 불확실한 시대를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작고 단단한 희망의 알갱이를 건넨다.
예술이란 결국 삶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권순익의 회화 앞에서 우리는 어느새 우리의 하루를 더 천천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에 잠기지도, 미래를 서두르지도 않는, 오직 ‘지금-여기’라는 순간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은 어쩌면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따뜻한 위로일 것이다.
그의 어둠은 빛을 품고 있고, 그 빛은 시간을 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의 틈에서 아주 조용한 봄을 마주하게 된다.
(아트앤비즈=정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