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불이공_죽음보다 깊은 사랑 2025 캔버스에 과슈, 템페라 147x226cm
갤러리마리(서울시 종로구 경희궁1길 35 마리빌딩)는 21일부터 12월 29일까지 이광 작가의 개인전 《우주호랑이- 호랑이 여자로 산다는 것은》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11월 29일(토) 오후 3시에는 이광 작가의 아티스트 토크가 열린다.
관람이 가능한 시간은 화-토 11시-19시 (매주 일-월요일 휴관)이며 무료다. 작품 구매 등 문의는 전화 02-737-7600, 이메일 infogallerymarie@gmail.com로 하면된다. 다음은 갤러리 마리에서 이광 작가의 이번 전시에 대해 설명한 보도자료 내용이다. 보도자료 이후에는 작가 자신이 솔직하게 자신에 대해 기술한 '작가 노트'를 가감없이 실었다.
폭력적인 어버지와 무력한 어머니 가정
이광의 회화는 상처로부터 피어난 기도의 형상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력한 어머니 사이에서 “어머니를 구원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품었다. 그 마음속에서 태어난 존재가 바로 호랑이였다. 즉 강하고 두렵지만 동시에 자비로운 존재. 세상의 어둠을 삼켜 빛으로 되돌리는 존재였다.
공무도하_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2025 캔버스에 과슈, 템페라 146x236.5cm
이광에게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상처 받은 어린 소녀의 내면이 만들어낸 신적 자아, 즉 세상을 바꾸고자 한 영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등학교 시절, 절망 속에서 삶을 포기하려 했던 그 밤, 산 등성이 하늘에 쏟아지던 별빛의 환영은 훗날 그녀의 회화 속 ‘신적 빛의 원형’이 되었다.
"삶을 포기하려 한 순간, 예술가로 태어났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그 순간부터 그녀의 길은 명확해졌다. 예술가로서 살기로 했던 것이다. 죽음에서 예술로, 절망에서 구원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시작됐다. 이후 작가는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비행기표 한 장만 들고 독일로 향했다.
뒤셀도르프에서 마르쿠스 뤼페츠 수제자되다
한국의 젊은 여성 화가는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며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절히 외쳤고, 그 폭발적인 열정과 광기 어린 몰입은 결국 스승이 된 마르쿠스 뤼페츠(Markus Lüpertz)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녀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수제자, 마이스터슐러(Meisterschülerin)가 되었다.
우주호랑이 KL4 2025 캔버스에 과슈, 템페라 53x40.9cm
뤼페츠에게서 배운 것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폭로하는 붓질의 힘이었다. 그녀는 붓을 휘두르며 자신의 상처를 긋고, 그 상처 속에서 새로운 영혼의 빛을 길어 올렸다. 이광의 여정은 서구의 모방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한국적 신표현주의’, 즉 샤머니즘의 영성, 불교적 공(空)의 사유, 그리고 설화 속 호랑이 여인의 서사를 통해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녀의 그림 속 호랑이는 신화적 존재이자, 세상의 약한 자들을 지키려는 자기 자신이며, 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 예술적 삼매(三昧, Samadhi)의 화신이다. 그 화폭에는 피와 기도, 불빛과 별, 그리고 사랑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녀의 예술은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피어난 구원의 서사이자, 자기 자신을 치유하고 세상을 다시 품고자 하는 한 여성의 기록이다. 《우주호랑이 — 호랑이 여자로 산다는 것은》은 절망을 건너 희망을 새긴 존재의 연대기이며, 인간이 끝내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한 영혼의 회화적 기록이다. 우주 호랑이의 탄생, 전시의 주인공 ‘우주 호랑이’는 작가의 상징적 자화상이다.
우주호랑이 KL2 2025 캔버스에 과슈, 템페라 53x40.9cm
갤러리 관계자는 "한국을 떠났던 소녀가 오십이 넘어 다시 돌아와 마주한 자신을, 호랑이 여자의 형상으로 형상화했다. 한국 산신과 민화 속 호랑이의 이미지를 소녀의 모습과 결합시켜, 해학적이면서도 모성적 존재로 재탄생시켰다. 이는 약자를 보호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작가의 내면적 열망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라고 언급했다. 다음은 이광 작가의 솔직한 작가 노트 전문이다.
[이광의 작가 노트]
전시 [우주호랑이- 호랑이 여자로 산다는 것은] 자전전 스토리: 1998 한국 탈출기 _ 가족이라는 중력/자기장에서 벗어나기
1975 꼬맹이 화가의 탄생 _동네 아줌마와 우리 엄마;
"저 벽에 붙인 그림 누가 그렸어?"
"우리 딸이 그렸지."
"에고 조끄만게 저걸 어떻게 그려? 엄마가 그렸겠지."
"아냐, 나는 그림 못그려. 얘는 종이랑 연필만 주면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
그 무렵 나는 얼굴을 주로 그렸다.
눈이 아주 커서 얼굴 절반을 차지하고, 그 눈속에는 동그라미, 네모, 세모같은 기하학 도형을 꽉 채우고, 바탕을 새까맣게 칠하는 우주소녀같은 여자를 그리면서 놀았다.
우주호랑이 KLD11 2025 종이에 마카 40.5x29.5cm
1976 아버지
도박중독이였던 아버지는 여러차례 직업을 바꿨다. 내가 태어난 경기도 연천 학담마을에서는 잘나가는 기갑부대 장교였다. 젊은 아빠는 퇴근을 해서 딸 자랑을 하느라 군복차림으로 나를 안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무슨 애기가 저렇게 예쁘게 생겼데요"
"인형이네 인형"
아빠는 기분이 좋아서 보조개가 쏙 들어가면서 ㅎㅎㅎ 웃는다.
묘하게도 1살인데 이 모습이 기억이 난다.
불행히도 화투를 치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서 쫒겨나다시피 일찍 제대를 했다. 그 때 그는 고작 28살이였다.
군대 장교였던 그는 집에서도 늘 명령을 했다.
" 가게 가서 소주 1병하고 거북선 1갑 사와. " 1000원은 준다.
나는 아버지가 말을 하면 너무 무서워서 돈만 받은 채 뭘 사오라는지 듣질 못하고, 가게 근처에서 과자를 사먹으며 놀았다. 학교를 다니기 전이니 6세, 7세 쯤일까? 애가 안오니까 찾으러 나온 엄마는 애가 맹하다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어이없어 했다. 그러다보니 내게 심부름을 잘 안시켰고 심부름은 언제나 오빠나 동생 몫이였다.
스마트했던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 1급 자격증을 순식간에 따고, 일본에 가서 신기술을 익혀 와서 연희동에 꽤 큰 정비소에 전무로 일했다. 동시에 공장에서 받은 연탄을 서울시내 연탄가게들에다 도매하는 사업을 했다. 연탄 배달 트럭을 열대쯤 돌리는 장사꾼으로 돈을 잘 벌었다. 그래도 그는 도박은 계속했고, 술도 계속 마셨다.그리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늘 맞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는 거의 말을 못했다. 아버지 앞에 서면 잡아 먹힐 것 같았다.
1982 홍은동 연탄가게
술과 도박 가정폭력속에도 삼남매는 무럭무럭 크고 있었고, 아버지는 다시 한 번 폭싹 망했다. 나는 어느덧 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고, 오갈데없이 길에 나앉게 생긴 아버지는홍은동에 연탄도매업이 아닌 소매업, 작은 연탄가게를 차린 것이다.
우주호랑이 KLD4 2025 종이에 마카 40.5x29.5cm
홍제천 다리를 건너 포방터 시장을 지나 큰길을 따라 난 도로변. 작은 가게안에 딸린 방은 간신히 두사람이 누울 만큼 작았다. 아버지는 목재로 방앞에다 1평 남짓 다락방처럼 방을 만들었고, 오빠와 나, 동생은 이 다락방에서 잘 수 있었다. 샷시로 된 유리문을 드르륵 열면, 쌔까만 연탄이 쟁여져 있고, 옷에 묻을 새라 조심스레 연탄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가면 쪽방같은, 방아닌 방에서 5식구가 살았다. 간신히 다리만 뻗고 잘 수 있었다.
이 때부터 학교를 가는 이외 시간은 연탄을 배달하고, 가내 부업으로 인형눈을 붙이고, 스티카를 접고 방학에는 공장을 다니면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낮에는 공장을 다니고, 저녁에는 부업 할 인형같은 것을 머리에 잔뜩 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 멀리 엄마가 머리에 무거운 걸 이고 오는 모습을 보면 어린 마음에 무척 반가워서, "엄마" 하고 얼른 뛰어나가 짐을 받아 주었다. 엄마는 코딱지 만한 방에 딸 둘과 앉아서 늦은 밤까지 인형눈을 붙였다. 이 좁은 집에서 밉던 곱던 5식구는 밥을 먹었다. 켜켜 누워 잠을 잤다.
‘매질 때문 일까?’
‘사는게 고단해서 일까?’
언제부턴가 엄마도 주기적으로 술에 취해 있었고, 자식들에게 악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삼남매는 어디에도 의지할 부모가 없는 것처럼 크기 시작했다.
체구도 작은 나는 씩씩하게 연탄 배달을 다녔고, 중학생 우리 오빠는 리어카를 끌고 밀면서, 당시 홍은동 일대 산동네에 얼키설키 붙어있는 무허가 판자집들에 연탄을 날랐다. 중3 짜리 남자애가 얼굴에 온통 검은 연탄때를 묻히고, 중1이였던 나도 얼굴에 까맣게 연탄을 묻히고, 일하는 건지 노는건지 애들답게 때로는 낄낄 웃기도 하고, 오빠가 태워주는 리어카를 쉥쉥 타면서 까만가면을 쓴 것처럼 연탄 배달을 했다. 돌아오는 길은 어둑어둑하게 해가 지는 날들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이 애들은 어리고 참 착했다. 연탄가게는 3년 정도 했고, 아버지는 종종 연탄을 사올 종자돈 마저 노름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가게를 접고 홍은동 더 깊은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 어쩌면 주인이 쫒아낸 것도 같다. 허구한날 때리고 부수는 지 이웃들은 훤히 알고 있었다. 너무 높아서 하늘도 가깝고 홍은동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꼭대기 중에 상꼭대기였다.
1983 지옥에 빠진 내 어머니
중학교 때부터 나는 다중인격으로 살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면 공부 잘하고, 인기도 많은 쾌활한 성격으로 살았다. 그늘이 없는 것처럼 지냈다. 배운적도 없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그림천재라고 유명했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도,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폭력과 아주 작은 돈이라도 도박과 술로 살고 있는 아버지를, 또 주기적으로 술에 취해 망가지고 있는 엄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집에 오면 언제 아버지가 밥상을 엎고 엄마를 때릴 지 몰라 늘 조마조마 했다.
그는 조폭들이 때리는 것처럼 엄마를 때렸다. 엄마는 아빠가 때리기 시작하면 소리 없이 맞았다. 사람아닌 사물처럼 조그맣게 웅크리고 "아야"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엄마를 때리면, 내 쪼그만한 등으로 엄마를 덮쳐서 대신 맞았다. 그러면 몇 번의 발길질을 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한 아버지가 나가버리고, 나와 내동생은 말없이 벽에 묻은 김치국물, 바닥에 쏟아진 음식물을 청소하고, 불도 못키고 부엌에 숨어서 몰래 술을 마시는 엄마를 보게 됐다. 엄마의 얼굴에 검고 시퍼런 멍자국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동안, 나의 가슴에도 피멍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살면서 지장보살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옥에까지 가서 어머니를 구해오는 지장보살, 그녀가 늘 가여웠다.
1986 오빠 _ 별이 빛나는 밤에 꽃다운 16살의 자살
집에는 나와 엄마만 있었다. 술이 너무 취해서 몸도 못가누면서도 엄마는 나에게 폭언을 한다.
"내가 니들 아니면 이 고생을 왜 해?"
" 나, 살기 싫어. 니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죽어." "나쁜년, 나가 죽어."
중학교 때는 엄마가 이러면 " 잘못했어요. 더 잘할께요"
"내가 커서 엄마 호강시켜 줄께" 하면서 엉엉 울면서 빌었다.
부엌에 작은 찬장이 하나 있었는데, 이 찬장에 엄마가 몰래 감춰두고 마시는 소주병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괴로움이 일어났다.
그 날 밤은 엄마도 제정신은 아니였다. 울고 불고 악을 쓰다 주무신다. 낮에는 의류공장에서 하루 종일 다리미질을 하고, 밤에는 목욕탕 청소를 하고, 집에 와서 남편에게 얻어터지기 일쑤이고, 주말에는 식당 허드레일을 하느라 그녀의 삶은 만신창이였다. 공장에서 월급을 타도 외상값을 갚느라 늘 빈털터리, 우리는 몇 천원인 육성회비를 못 내서 학교에서 늘 불려 다녔다.
"술 좀 안마시면 안돼요?" 자살시도
그날 밤 인사불성이 된 엄마를 그리고 나를 포기해 버렸다. 길이 안 보였다. 얼마전 동회에서 나눠 준 쥐약이 떠올라서 봉지를 뜯으니, 가루약이 들어 있었고, 가루를 그냥 먹을 수는 없고, 물에 타서 먹었다.
우연히 고3이던 오빠가 이 광경을 보고 쓰러진 나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산동네라, 가로등도 별로 없던 좁고 비탈진 길을 한 참을 내려 가야 차가 다닐 수 있는 큰길이 나온다. ‘그는 어느 병원을 가야할 지 알았을까?’ 오빠의 등에서 나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게 많고, 초롱초롱 빛나고, 핑 돌도록 너무 아름다웠다. 죽었던거 같다. 무슨 귀신의 조화속인지 나는 다시 현실에 접속되었다. 눈을 떠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칠흑같은 하늘 아래, 가을 바람은 차고 한 소년이 나를 업고 뛰는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순간 돈도 없는데, 병원비 걱정이 됐다.
"오빠, 그냥 집으로 가. 우리 돈 없잖아. "
오빠가 발길을 돌렸다.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한 2주정도 쌩으로 죽을만큼 아팠다. 특히 머리가 깨지도록 아팠다. 이 사건은 오빠와 나만 아는 일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오빠의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아픔을 새겨 놓은 것이 미안하다.
1986 선생님 선생님
죽다 살아난 나는 처음으로 화가가 되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부모는 믿을 수가 없고, 스스로 어떻게 살지 결정을 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간다든지, 더욱이 미술을 배운다든지는, 꿈도 못꾸던 때이다.
‘미대를 가려면, 화실을 다녀야 한다던데… 돈이 없잖아.’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 막연히 누군가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 줄 것 같았다.
나는 친구 한 명과 무작정 홍대 앞으로 나갔다. 홍대 앞에 미술학원들이 많다는 것만 생각하고 생에 처음으로 하늘에 내맡겼다. 첫번째도, 두번째도 원장 선생님이 안계셨다. 세번 째 간 작은 화실, 문을 두드렸다.
"저, 원장님 계세요?"
어떤 여학생이 나와서 " 잠깐만요." 하고 들어가더니 왠 키 큰 아저씨가 나온다.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저… 제게 가르쳐 주시면 이 은혜는 갚겠습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반 쯤 목이 메어 간신히 말했다.
선생님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안 묻고는
"저기 가서 한장 그려봐."
처음으로 화실이라는 데를 들어가 봤다. 하얀 석고상들이 위풍당당하게 펼쳐져 있고, 많은 학생들이 밝은 조명 아래 뎃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무뚝뚝하게 잘생긴 아그리파를 이젤 앞에 앉아 시커멓게 한 장 그렸다.
" 음… 12월부터 나와" 하곤 별 말씀도 안하고 다른 학생들을 가르치신다. 화실을 나오면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11월 말이라 날도 추운데, 친구는 내가 그림 한장을 그릴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야 됐어~~" 소리를 지른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하신, 킹콩이라는 별명의 선생님을 만나, 홍대 미대 회화과에 갔다. 학교 마치고 그 무서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갈 데가 생긴 것이다.
또 한 선생님, 고1 때 담임이셨던 젊고 아름다운 수학 선생님은 내가 고3일 때도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교무실에 불렀다. 내가 눈에 밟히셨나보다.
" 공부는 잘 되니?" 수학 문제지를 건네 주신다.
"수학만 좀 올리면 서울대도 가겠다." 그리고 티 안나게 내 손에 꼬깃하게 접은 돈 만원을 쥐어 주신다.
" 이 걸로 재료 사." 따뜻한 손이였다. 나는 이 돈으로 호미화방에 가서 스케치북도 사고, 4B 연필, 수채화 물감을 샀다.
1990 거울을 보기가 무섭다
"얘, 내 딸이요. 씨"
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에 삥 둘러싸여 있고, 경찰 몇이 출동을 해서 아버지를 가로 막는다.
"그래도 길에서 이러시면 안돼죠."
나는 길바닥에 너덜너덜하게 맞아서 쓰러져 있는 채로, 경찰이 아버지를 잡아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들도 사람들도 그냥 흩어진다.
바로 몇 분 전이였던가. 아버지가 " 대학 가지말고, 어디 공장을 다니든 뭐든 해서 돈 좀 벌어 와"
우리는 산동네 무허가집에서도 또 쫒겨나고, 갈데가 없어서 엄마친구 소개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포장마차에서 엄마랑 아빠가 살고, 나는 독서실에서 살면서 낮12시부터 밤 9시까지 치킨집에서 알바를 하면서 지낼 때다.
‘사실 이 형편에 대학을 어떻게 간단 말인가?’
처음이다.아버지에게 대든것이 "싫어요. 저는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요."
퍽, 퍽 소리를 내며 주먹이 얼굴을 내려 친다. 발로 밟는다. 폭력 영화처럼, 한 참을 맞았다. 엄마가 말리니 엄마까지 두드려 팬다.
"니가 자식을 이따위로 가르친 거야", "썅년들’"
나는 포장마차 밖으로 간신히 도망을 쳤다. 어지러워서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 바로 뒤에서 아버지가 뛰어 나와 내 머릿채를 잡고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기면서 질질 끌고 간다.
웅성웅성…사람들이 신고를 한거 같다.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길에서 계속 맞고 있었다. 나는 울지도 않고, 엄마처럼 맞고 있었다. 거울을 보니 괴물처럼 이지러진 얼굴과 눈이 마주친다.
‘저게 나라고?‘
머리통이 퉁퉁부어 풍선처럼 부풀러올라 코끼리처럼 보였다. 온통 시커먼 멍, 퉁퉁부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헝클어진 머리가 피범벅이되어 떡이져 있다. 눈을 뜰 수도 없는 어린 짐승이 거울 속에서 훌쩍이고 있다.
1992 신이시여 어디 계신가요?
어릴 때부터 마음을 둘 데가 없었다. 몸도 둘 데가 없었다. 내동생, 만화를 좋아하고 착한 아이. 어디갔나 하면, 만화가게로 찾으러 가면 된다. 동생은 만화가게로 도망가서 쉬었던 것이다. 낮도 밤도 없이 술을 마시고 빈둥빈둥 누워서 TV를 보는 아버지는 늘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구멍가게에 가서 외상으로 소주랑 담배 사오라는 심부름을 어릴 때부터 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 셋은 아버지와 거의 말을 안했다. 그나마 동생이 술심부름을 다닌 것이다. 동생도 살려고 길을 찾고 있었나 보다. 동생은 언제부턴가 홍은동 성당을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교리를 가르쳐 주신 수녀님이 따뜻하게 잘 해주신 거 같다. 나도 가끔씩 동생을 따라 성당에 다녔다. 나는 막연히 마더 테레사의 기도하는 사진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 때도 나는 남들이 믿는 신앙이 뭔지 잘 모른다. 배워서 아는게 아니라 절로 미쳐야 되는 것, 그래서 이게 예술이랑 좀 비슷하다. 누가 물어보면 "특별한 종교는 없어요. 그냥 뭐 우주랄까, 그냥 전체를 신이라고 생각해요."
대학 때 성당을 좀 열심히 다녔다. 아무도 없는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편했다. 너무 지쳤을 때는 긴의자에 옆으로 누워 잠도 잤다. 성당으로 피신을 간 거다. 집은 늘 지옥이였고, 집을 떠나 남들의 눈을 피해 혼자 쉴 데가 필요했다. 그래서 등산을 학교보다 더 열심히 다녔다. 혼자 산에 다니는 게 나에게는 신앙 생활이였다. 배낭을 메고 설악산, 지리산, 오대산… 계절별로 이산 저산 올랐다 내려갔다하는 동안 내 대학 시절이 , 꽃다운 청춘이 다 가고 있었다.
나는 삘이 꽂힐 때만 그림을 그렸기에, 학교에서 배우는 건 그다지 없었다. 그리고 중학교때 부터 시작된 다중인격 역할 놀이에 지쳐 있었다. 하하호호 웃으며 실기실에서 학점 타령을 하는 애들과 나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초격차 같은 것을 느꼈다. 솔직히 좀 시시했다.
"언니, 왜 그림 만 그려?" 하하호호, 까르르… 한데 섞여 놀지 않는 나를 놀리는 거다. 홍대는 끼있고, 잘난 애들 천지였다.
언제부터 였을까?, 나는 가슴에 딱딱하게 굳은 돌이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중력장은 기분 나쁘게 웅하는 소리를 내면서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으로 거세게 끌어 당겼다. 블랙홀에 끌려 들어 가지 않으려면 인간의 안간힘으로 될까?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 막연히 단 한 번이라도 신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쯤 살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20대 초반인데, 나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모세가 나이 80에 만난 그런 신, 떨기 나무에 불타는 신. 나도 접신하고 싶었다. 그게 예수일지, 부처일지, 누구라도 좋은니, 초월자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으로 죽기살기로 등산을 다니고, 산길에서 몸이 부서져라 기도를 하면서, 온 우주에 매달리고 있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단 한 번 만이라도 신에게 받고 싶었다. 홀로 산길을 걸으며 묻고 또 물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원망을 한다.
‘어디 계세요? 제발, 내 가슴에 타오르는 이 불 같은 돌 좀 녹여 주세요.’
이 돌은 한 번씩 깨어나 진동을 할 때면, 나를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통째로 삼켜버릴 만큼 힘이 세다. 나는 이 소용돌이 같은 진동에 끌려가지 않으려 정수리에서 가슴으로 찬물을 쏟아 부어야 했다. 가슴에서 ‘웅‘하는 싸이렌 소리를 내면서 진동이 일면, 호흡을 멈추고, 눈에 힘을 주면서, 눈가가 뜨거워 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모아 단 한방울도 맺히지 않게 숨을 멈췄다. 괜찮아. 이정도는 버틸 수 있어. 남들 앞에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절대 울지 않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리고 살다보니 나에게 신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그림을 그리는 것, 이 건 축복이였다. 혹시, 그토록 찾아 헤메던 떨기 나무가 내 가슴에 있었던 걸까?한용운님의 ‘슬픔의 삼매’ 라는 시에서 님을 잃은 슬픔과 온전히 하나가 된 삼매의 경지가 절절히 와 닿았다.
1992 인식의 지평_ 낯선 존재에 홀린다.
20Kg 배낭을 메고 악바리처럼 산길을 오른다. 설악산, 용대리에서 백담사를 거쳐 수렴동 산장까지 도착해야 오늘 밤 잘 데가 있기에, 비가 와도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우비를 써도 비와 땀에 흠뻑 젖어서 발길이 무겁다. 비에 젖은 산길이라 미끄럽고 위험하다. 그런데 빼꼼하게 연두색 청개구리가 수풀 사이로 나랑 눈을 마주 치는 것 아닌가? 쪼꼬만 볼을 불룩불룩 거리며 숨쉬는 게 어찌나 묘하고 예쁜지 걸음을 떼지 못하고 바라본다. 나도 개구리처럼 숨을 쉰다. 우주도 개구리처럼 들쑥날쑥 숨을 쉰다.
산에 가면 숨을 좀 쉴 수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홀로 다니니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쓸데없는 빈말을 안해도 되고, 나는 온전히 자연과 나만 만나게 하면 되는 것이다. 혼자 있으면 나는 사람들과 뒤섞여 있을 때와는 다른 존재가 된다. 낯선 존재들, 홀연히 나타난 나비, 곁눈질 하면서 나를 보고 있는 까치, 까마귀 .. 벌레까지 특별한 존재여서 잘 보는 게 아니라, 보다 보면 특별해 진다. 존재라는 게 참 묘해서 보려고 하면 나타난다. 뿅하고 나타나서 거꾸로 나를 관찰한다. 눈이 맞으면 홀린다. 미묘한 움직임, 떨림, 알던 것이 하나도 없던 것 같이 멍해진다.
아주 낯설고 묘하다. 이 우주에서 내가 뭘하고 있는거지? 여기가 어딘지, 난 누구인지, 재는 뭔지,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언어가 사라지고 떨림만 남는 상태 이런 혼동이 들 때, 내가 나라고 붙들고 있던 몸이 사라진다. 나라고 할 것이 별로 없이 의식 전체가 몸을 빠져 나가 줄었다 커졌다 한다.
그게 뭐든 일단 나타나면 사람 아닌 사람들과 직관의 언어로 대화를 한다.
인디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람과도 대화하고, 구름과도 대화하고 비와도 대화하고… 잘 느껴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어서 나를 멈추게 한다.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흙도 돌도 나무도 가만히 손을 대면 뭔가가 흐르고 있다. 전기가 통한다. 따뜻하고 생생하다. 인간만이 지능이 있고, 의식이 있다고 하던가?
1993 솟구치는 피 피 피 _ 오빠
91년도부터 군대를 다녀온 오빠는 아버지를 도와 일을 했다. 자동차 고물상
자동차 정비에 빠삭했던 아버지가 새로 시작한 사업은 폐차될 차에서 쓸만한 부품을 가려, 고철과 부품으로 자동차 정비 공장에 되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잘 되었지만 그 역시 도박으로 다 날렸다. 다 큰 딸들, 아들을 데리고, 어둡고 좁은 지하 월세방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간 아들에게 월급을 준 적은 없었다. 오빠는 아버지와 일하기 싫어했지만 강압적으로 끌려 나갔다.
머리가 커지면서 오빠는 아버지가 엄마를 때릴 때 팔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더 흉폭해져서 오빠를 조폭들이 때리는 것처럼 닥치는 대로 때렸다. 나는 얼른 부엌에 가서 칼을 감췄다. 내가 진짜 무서웠던 것은 오빠가 아버지처럼 술을 마시고 성격이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친족간에 칼부림이 난다면, 욱하면 눈이 뒤집혀서 아버지고 어머니고 다 죽일 것 같았던 오빠 때문이다.
그 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마침 술에 취해있던 오빠가 못참고 대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고, 도저히 아버지를 칠 수 없었던 오빠가 유리문을 쳤다. 오빠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유리에 베어 혈관과 신경이 너덜너덜하게 드러나고, 나는 수건으로 팔을 둘둘 싸서 압박을 했다. 출혈을 막아야했다. 술에 취한 오빠는 자기가 다친것도 상관없이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다 죽여버릴거야"
나는 동생과 급히 차를 불러 대학병원으로 향했고, 온 힘을 다해 그의 팔을 잡고 있어야 했다. 갑자기 호출받아 나온 의사는 자다 깬 모습으로 우리 삼남매의 반쯤 미쳐있는 모습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술 때문에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는 통에 지혈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피범벅이였다.
"술 깨기 전에는 수술 못해요."
나는 울고 불며 제발 좀 살려 달라고 의사 선생님께 매달렸다.
"진정을 해야 수술을 하죠" 그도 소리를 지른다.
내가 너무 불쌍했는지, 의사는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새벽녁에 수술에 들어갔다. 그 때 입은 상처로 오빠는 왼팔과 손에 장애가 생겼고, 가슴에 또 한 번 큰 흉터가 생긴 것이다.
1993 측은지심_ 낯선 병실에서 만난 불쌍한 여자
"언니, 큰일 났어. 빨리 병원으로 가"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 집에 전화를 했다가 순간 깊은 수렁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지, 지옥에 살고 있던 게지.’
물귀신처럼 발끝을 잡아 끄는 엄청난 중력으로 불행한 기운에 또 끌려들어 갔다. 핸드폰도 없고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어떻게 찾아갔을까? 나는 가고싶지도, 가지 않을 수도 없이 강동구에 있는 모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에게 엄마가 몇호실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병실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어두운 병실에 침대 몇개가 있고 내 엄마일 거 같은 여자가 누워있다. 가까이 다가갔다. 말없이 눈만 꿈뻑꿈뻑하는 어린 짐승처럼 한 여자가 낯설게 눈을 마주 친다. 머리와 목에 붕대를 감고 가만히 누워있다. 가슴에서 뜨거운 돌이 진동을 시작했다.
"괜찮아요?", 엄마는 말이 없다. 아버지가 때리다가, 턱뼈가 살 밖으로 튀어나와 수술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가 엄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나는 평생을 맞고 사는 이 미련한 곰같은 여자의 힘없는 딸, 온 몸이 지구 깊은데로 자석처럼 끌려가듯 무겁기만 했다. 이 중력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피는 얼마나 많이 흘렸을까? 또 동생은 얼마나 놀랐을까? 병실을 나와 더이상 늪같은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호랑이굴이었을까? 갈 데가 없다.
1995. 인도로 가는 비행기_ 한국 아저씨
"인도는 처음 가는 거예요? 아니 혼자서? 인도가 얼마나 위험한데 혼자 가요? 아는 사람은 있어요?"
" 아뇨, 없어요."
내 옆좌석에 앉은 젠틀해 보이는 한국 아저씨는 걱정스럽게 나를 본다. 당시 나는 왜소한 체구에 짧은 커트 머리, 눈만 덩그라니 큰 고등학생 같은 얼굴로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미대 3학년 휴학생. 당시에 나는 등록금이 없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빈틈없이 시간표를 짜서 알바를 하고 돈을 모았다. 처음으로 집으로부터 도망칠 기회가 왔다. 쇼생크 탈출처럼. 그 돈 중 일부는 엄마에게 드리고, 치과 치료를 해드리고, 안경을 하나 맞춰 드렸다. 남는 돈을 잘 아껴 쓰면서 유럽과 인도를 약 7개월간 혼자 배낭 여행하던 때이다.
4개월동안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면서, 미술관들을 뺑뺑 돌았다. 책으로만 보던 그림들을 직접보니 뭔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 서양화, 회화를 배운다는 게 불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림의 홍수에 빠져 흘러다니느라 4개월은 짧았다. 아쉬운 발길을 떼어 홍콩을 경유해서 델리로 떠났다.
나는 홍콩에서 델리로 가는 비행기의 몰골에 놀랐다. 작고 언제라도 폐비행기가 될 것처럼 생긴 고물 비행기가 후덜덜하게 떨면서 아슬하게 날고 있는 7시간 내지 8시간 동안 ‘이런 후진 비행기도 무사히 착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도라는 미지의 세계에 도착한다는 기대로 부풀어 올라 꿈꾸듯 앉아 있었다. 드디어 간디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 밖으로 나가는 데 검은 아스팔트 바닥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기겁을 해서 잘 보니 어두운 길바닥에는 사람들이 그냥 누워 자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택시 삐끼들이 호객행위를 하느라 악을 쓰고 있었다.
마침 뒤에서 나오던 한국 신사는 " 제가 차로 숙소에 데려다 줄께요. 인도는 너무 위험해요."
공항 앞에 그를 픽업하려고 나온 운전사가 있었고,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여 꿈틀대는 공항바닥을 빠져나와 안전하게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런 차는 인도에는 거의 없던 고급차였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내 손에는 핸드폰이 아닌 [Lonely planet] 여행서 한 권이 들려 있었고, 이렇게 모험이 시작됐다.
델리에서 길을 잃은 채 신비체험을 하다.
일단 어딜 가려해도‘ 뭘타고 가야하지’ 하며, 잠시라도 길에서 두리번 거리는 얼굴을 하면 득달같이 검은 얼굴의 릭샤꾼들이 달려들어 ‘할로, 웨얼유 고잉"을 하는 통에 길바닥에 서있는게 곤역스러웠다. 게다가 자전거 릭샤꾼들의 맨발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맨발로 사방팔방 달리고 있는 릭샤꾼들의 땀범범이 된 검은얼굴을 보면, 루피 몇원에 도저히 그 가마위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교통수단은 오토바이 릭샤였다. 덜 미안하고 먼지 풀풀나는 거리를 제법 빨리 달렸다. 나의 숙소는 남쪽에 있었는데, 하루는 꽤나 먼 델리 북쪽에 있는 레드포트를 방문했다. 크고 아름다운 붉은 성이였다. 성안을 이리저리 헤메다가 그만 엉뚱한 통로로 접어든 것이다.
‘아뿔싸, 여긴 어디지?’ 걸음을 떼면 뗄 수록 더 깊은 미로에 빠져 버렸다. 티비에서나 보던 기아 난민촌으로 나는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앙상하게 말라서 누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뼈만 남은 얼굴위에 파리떼가 새까맣게 달라 붙어 있고, 인도에서 그 신성하다는 소도 뼈만 드러내고 거의 굶어 죽어가는 것 아닌가. 해골에 살도 없이 주름지고 검은 피부만 씌워진 여자들, 아이들, 남자들이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나 정도 이방인 여자는 누가 잡아채가서 죽여도 아무도 모를 무법지대, 가도가도 이 난민촌은 끝이 안 보였다.
‘정신을 차려야지‘ 그런데 귀가 안들린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스스로 감각 스위치를 꺼버린 건지, 나는 몇시간을 거의 시체에 가까운 사람들 사이를 헤메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여긴 도체 어디지? 연옥인가? 걷고 있는 것이 나인가? 길이 나를 걷는 건지. 나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를 잃어버렸다. 그저 눈만 뜬 채 죽음의 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떠도는 동안 시간은 더 느리게 흐르고 나는 점점 몽롱해져 갔다. 이렇게 밝은 대낮에 , 강렬한 태양 아래 인간의 목숨은 너무 보잘 것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보이는 모든 것은 더러웠고, 불쌍했고, 두려웠다.
이 날을 돌이켜보면, 더 기적적인 건, 이 거대한 난민촌에서 조그만 미물같은 내가 무사히 빠져 나왔다는 것. 오 신이시여!
1995 타르사막_ 별이 쏟아지는 밤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간다. 자이살메르_ 이 모래도시는 희안하게 아름답다. 점점 도시로 가까워지자 황금색으로 빛나는 포스에 너무 아름다워서 울 뻔 했다. 성안에 숙소를 잡고 주변 탐색을 한다. 인도 여행에 기술내지 요령 비슷한게 붙기 시작했다.
가격을 흥정하기도 하고, 구걸하는 꼬마들 한 10명 쯤은 줄줄 달고 다니기도 하고, 기차를 타도 내 자리를 뺏기지 않고, 그들이 나를 신기하게 구경하는 것에 별 불편을 안 느끼면서 현지인들 처럼 짜이를 사먹을 수 있게 됐다. 그들의 순박하고 천진한 미소는 백만불짜리였다.
특히 아이들이 새까맣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할로 원루피", "할로 원루피"하면서 따라다닐 때, 나는 사탕을 하나씩 줬다. 예뻤다. 숙소에서 낙타를 타고 타르사막을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사막에 대한 동경이 이토록 컸다니, 나는 주저없이 낙타 사파리를 등록했다. 사막에서 5박. 다음날 출발지에서 만난 나의 가이드인 앳된 꼬마와 낙타는 내 긴장을 다 녹였다. 한마디로 무장해지 당했다. 10살이라는 가이드의 키는 8살같이 작고 영어는 한마디도 못했다. 눈이 반짝반짝해서 별들이 내려 앉아 있는 것 같은 천사같은 아이였다.
내가 탈 낙타도 눈이 커서 나는 두 왕눈이들과 여행을 떠나야 했다. 예뻤다.
낙타는 큰 키를 수그려서 무릎을 꿇고 나를 태웠다. 순하디 순한 놈이여서, 하나도 무섭거나 다칠 것같은 걱정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무거워서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일행이 꾸려졌다. 각자 낙타의 주인들이 자신들의 낙타를 탄 손님을 모신다.
함께 출발한 3명의 가이드는 할아버지, 소년, 꼬마. 그리고 머리가 좀 벗겨진 영국남자, 호주에서 온 긴머리 아줌마, 신기할 정도로 그들은 말이 없고 온화한 사람들이였다. 말은 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떠드는 애는 소년 가이드였고, 심한 인도식 악센트로 영어를 제법 잘 했다.
할아버지도 영어를 못하고 끼니가 되면 능숙한 솜씨로 밥을 한다. 나뭇가지를 줏어와 불을 피고, 불속에가 밀가루 떡반죽을 던져 넣고 차파티를 굽고, 커리를 만든다. 낯선 사람들이 옹기종기 불 근처에 앉아 밥을 먹는 식사 의례
사막에 밤이 왔다. 텐트도 없이 이불 두장. 사막의 밤은 춥다. 누워서 얼굴만 이불밖으로 빼놓고, 하늘을 보니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을 쳤다. 별이 하늘에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악하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보면 볼 수록 별이 늘어나면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잘 수가 없었다. 밤새 별을 온 몸으로 받아내느라, 세포가 다 터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또 잃었다.
사막의 아침, 다들 잠이 깨서 저 멀리로 화장실도 없는 화장실을 다녀 온다.
할아버지는 모래로 냄비도 씻고 그릇도 씻어서, 차파티를 굽고 커리를 만든다. 내 꼬맹이 천사는 작은 양푼에다 말없이 내 세숫물을 대령한다. ‘물은 어디서 난 걸까?‘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낙타에 올라타 모래와 황무지가 뒤섞인 미지의 땅으로 사뿐사뿐, 모래위에 부유하듯 걷는다.
캘커타- 마더 테레사
"정말 캘커타에 마더 테레사가 있다고?" 숙소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사진 작가가 귀뜀해 줬다. 그가 사진 촬영을 갈 거라고 하니, 얼른 따라 나섰다. 그는 키가 크고 걸음이 빨라서 나는 종종 걸음을 치며 뒤따라 갔다. 외국인들에게 내 모습은 중학생 정도 보였던 모양이다. 만나는 여행객들이 혀를 내두른다.
"너 몇살이니?"
" 나 24살이야."
"청소년인 줄 알았어." "혼자 다니는 가야?"
" 응"
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는 미션은 걸어서 3시간 쯤 걸렸다. 인도의 대도시의 난민촌은 규모가 어마아마 했다. 나는 또다시 난민촌에 들어갔다. 사진사의 뒤를 쫒아 가다보니, 혼자 델리에서 빠졌던 난민촌과 다르게 안도가 되었다.
아침에 일찍 출발했는데, 도착해 보니 거의 정오였다. 마더 테레사는 하루에 두 번 외부인들과 그냥 마당에 서서 접견을 했다. 나도 인도 사람들 뒤로 줄을 섰다. 저기 수녀님이 보인다. 얼굴에는 굵고 강한 주름이 짜글짜글하고, 파란색 테두리를 두른 인도 사리처럼 생긴 하얀 수녀복을 입고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주저함이 없이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춘다.
’헉’하고 깜짝 놀랐다. 발이 사람발이 아니였다. 평생 인도인들처럼 맨발로 다녀서, 그녀의 발은 화석 처럼 굳은 돌이였다. 생김새도 코끼리 발 같았다.
내 차례가 다가오는 데, 나는 내 처신을 못 정했다.
나도 발에 입을 맞춰야 할지, 당황스러워서 일단 뒷사람에게 양보를 하고 미션 건물로 들어갔다. 수십개의 침대가 있는 큰방, 대낮이지만 건물 안은 좀 어두웠다. 갓태어난 애기들에서 1살 미만으로 보이는 애들이 침대에 즐비하게 누워있다.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들, 병든 아이들이었다. 낯선 공간,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한 젊은 수녀님이 아이를 안고 내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안아 보라고 내게 아이를 넘기는 것 아닌가?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피부가 까무잡잡한 아이를 조심스레 안았다. 놀라운 일이 생겼다. 내가 아이를 받아서 안은 것인데, 아이가 나를 안아 주는 것이다. 뜨거운게 주르륵 흘러 내렸다.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마더 테레사는 오후 3시에 다시 접견을 했다. 이번에도 줄을 섰다. 내 차례, 가까이 서서 나는 아이처럼 뻘쭘하게 눈을 마주쳤다. 그 때 수녀님이 두 세 걸음 다가와 콱 안아 주신다. 아주 세게. 뼈가 으스러지게 꽉 안아 주신다. 이 포옹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가피, 방패가 씌워진 것 같이 뜨겁고 황홀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진작가는 온데간데 없고, 나는 홀로 난민촌을 헤치며 숙소로 돌아왔다.
다르질링_ 호랑이
히말라야 산자락에 걸쳐 있는 다르질링, 세계적인 차밭으로 유명한 데, 산이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산이 걷고 싶었다. 몇 번이고 차를 갈아타고, 인도인들과 뒤섞여 버스를 타고, 길도 멀지만 교통이 안좋아서 퍽도 오래 걸린다.
이동 중일 때는 화장실이 불편해서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2,3일은 걸린 것 같다.
구불구불 산길을 고물차를 타고 비포장도로여서 엄청 위험한데, 운전자도 탑승자도 막 달린다. 차 앞좌석에는 알록달록 온갖 종류의 신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시바, 비슈누, 가네시, 칼리… 키치하고 요물쓰럽게 생긴 신들이 장식된 요란한 버스는 언제 가다 퍼져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고물중에 꼬물차. 비탈진 절벽을 마구 달리는 운전자나 목숨 내놓고 타는 승객이나, 인도의 현실은 이미 초월적이다. 그래도 달리는 동안 아찔하게 아름다운 히말라야가 한 고개씩 넘을 때마다 살짝 살짝 신비한 얼굴을 내비친다.
인도에 와서 3개월이 넘었다. 나는 인도의 이글대는 태양 아래 돌아다니다 보니 얼굴도 꽤 타서, 어쩌다 거울을 보면 ‘저 사람은 누구일까?‘ 싶었다. 지금이 4월이니까, 학기는 이미 시작한 것이다. 마을 중턱에 숙소를 잡고, 동네를 어슬렁 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계단식 차밭은 산등성을 따라 굽이치듯 펼쳐지고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음악처럼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산에는 밤이 빨리 온다. 걷다보니 어두워지고 있다.
"저 반짝빤짝 하는 건 뭘까?" 차밭에 별들이 내리고 있다. 수천 수만의 반짝이는 별들은 반딧불이였다. 오묘하게 반짝거리면서 나를 통과해 날아다니는 존재들, 머릿속에 불이 들어오는 것 처럼 나도 빛나고 있었던 거 같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누군가 "여기 동물원에 시베리아 호랑이가 있어." 귀띔을 준다. 나는 바로 나갈 채비를 하고 산길을 재촉해서 동물원에 도착했다. 허름하다. 이런데가 동물원이라니. 제대로 된 우리 하나 없어보인다. 아무 것도 안보고 곧장 호랑이에게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방에 호랑이가 앉아 있다. 방에는 나와 호랑이 둘 뿐. 창살을 사이에 두고 채 3미터도 안돼는 거리에서 고요한 노오란 눈과 까만 눈이 마주쳤다. 인간의 언어는 어런 상황을 표현하는 데 쓸 수가 없다. 창살이 없으면 홀라당 잡아먹히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창살을 사이에 두고 나는 호랑이에게 혼을 털렸다. 뭔지 모를 자석같은 힘에 이끌려서 시공에 정지된 것 처럼 서 있었다. 아름다웠다. 홀렸다. 두려움의 최고치와 아름다움의 최고치를 동시에 찍으면서 합체가 됐다.
신을 만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요동치다가 몸 밖으로 나와 버렸다. 뇌가 마비되어 우주 밖으로 튕겨 나가 버렸다. 온 몸에서 털이 하나 하나 돋아나는 것처럼 생생했다. 동물원 문이 닫힐 때까지 그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다르질링에 머무는 동안 호랑이는 몇 번 포효를 했다. 산이 흔들리고, 나도 흔들렸다. 아직도 내 귓가에 쩌렁쩌렁하다.
1996 아버지의 죽음
"언니, 엄마가 등록금 냈고, 언니 친구가 대신 수강 신청해 놨어."
인연이 아직 안끊긴 건가? 나는 다시 아버지의 늪, 중력장으로 끌려 들어가야 했다. 나는 4월 중순에 인도에서 들어와 늦게서야 4학년으로 복학했다.
인도에서 돌아오기 싫었다. 몸이 고생스러운 인도보다, 집이 더 싫었다.
"미안하다." 아버지가 수화기를 잡고 운다. 나는 아무 말을 안했다. 인도에서 돌아와서, 내가 없는 동안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오빠가 여동생 둘을 데리고 부모와는 결별선언을 하고 분가했다. 아버지와 엄마도 헤어져서 따로 살게 되었다. 반지하방이지만 방이 2개 있고, 돈은 오빠가 벌어왔다.
수화기를 잡은 채 아무말도 안했지만, 가슴이 찹찹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운 적도 없었다. 며칠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채로 발견 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고작 52세 였다.
고물상 컨테이너에서 심정지로 발견되었다. 술병이 쌓여 있었고, 키우던 진돗개들이 며칠째 굶고 있었다. 갑자기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고, 귀신에 홀린 듯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계속 웅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인간이란 왜 이렇게 맥아리 없이 나약한지, 하루 아침에 떠날 지 누가 알았겠는가? 아버지는 화장터로 이송됐고, 일하시는 분이 마지막 작별을 하라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무도 울지 않았던 거 같다. 아직 온기가 있어 보이는 얼굴, 손, 나는 만지지 않았다. 만질 수 없었다. 불구덩이에 그의 몸을 밀어넣고, 순식간에 태워져 하얗게 해골이 되어 나왔을 때. 나는 웽하는 싸이렌 소리가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어지러웠다. 뭔가에 취해 있던 거처럼, 이 최면은 아주 오래 갔다.
독일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데, 아버지가 걸어 놓은 저주가 계속 따라 다니는 것 같았다. 그 날로, 마지막 전화를 하셨던 그 날로 돌아갈 수 만 있다면.
"괜찮아요."
"어디세요? 어디 아프세요?"
"제가 지금 갈께요." 이 말을 못하고 돌아가시게 한 것이 마음에 한이 되었다.
어쩌다 길에서 아버지를 마주칠 때가 있었다. 모른 척하고 싶었다. 저런 사람이 아버지인게 너무 부끄러워서, 길을 빙 둘러 가기도 했다. 또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혹 길에서 저 앞에 가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한 손에는 뭔가를 산 봉지를 들고, 한 손에는 담배를 물고, 이 제법 야무지게 잘 생겼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했다.
아버지를 단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신이 아니라, 아버지를 단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 가슴의 타오르는 돌의 불을 끌 수 있을 텐데. 이 죄책감을 내려 놓을 수 있을 텐데. 시간을 돌이킬 수가 없다. 이 생에서는 기회가 없다. 나보다 더 불쌍하게 살다간 이 남자를 구해줄 길이 없다.
이광 작가에 대하여
+. 한국과 베를린을 기반으로 국제적 활동을 하고 있는 재독 작가 이광의 개인전이 갤러리 마리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의 의의는 독일 신표현주의의 대가의 마커스 뤼퍼츠(Markus Lüpertz)의 수제자로 신표현주의를 계승한 이광작가가 한국적 신표현주의를 표방하여, 유럽 회화 전통과 한국의 회화 전통을 잇고, 동서양의 철학과 문화의 가교 역활을 하는 작가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 또 하나의 의의는 1998년 유학을 떠나 현재까지 약 26년 독일에서 작업하던 이광작가에게 갤러리 마리에서 특별 레지던시를 제안하여, 갤러리 아랫층에 작업실을 제공하여, 오랜동안 해외생활로 인한 유목적 정체성으로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작업하던 시선과 한국인으로서의 자아가 함께 만나는 계기와 고향 집에 돌아와 작업을 할 수 있었던 환경을 만들 수 있었던 1년간의 레지던시 결과물전이기도 하다.
+. 1970년대에 미니멀과 개념 미술에 저항하여 독일에서 활발히 전개되어 전세계로 확산되었던 신표현주의는 독일 사회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참상과 이민족을 집단 학살했던 독일 사회에 스스로 반성과 참회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구심점이된 시대적 당위성과 필요성의 예술이였다.
암젤름 키퍼(Anselm Kiefer), 게오르그 바젤리츠( Georg Baselitz), 등 수 많은 전후 예술가들과 이광작가의 스승 마커스 뤼퍼츠(Markus Lüpertz)는 인간의 폭력성과 참회, 속죄를 주제로 회화 정신을 동시대의 문제의식과 결합한 시대의 천재들이였다.
+. 이광작가의 문제의식은 "고통받는 영혼의 정화와 치유"그리고 소외된 약자에 대한"연민"이다. 2022년 ‘블랙 피에타’라는 작업을 통해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작업으로 보여주었으며, 2023년 한국적 전통 소재인 ‘삼족오’와 ’사신도‘등의 소재를 과감히 소환시켜, 동시대의 폭력성과 약자들의 아픔을 보여주었다.
2023년 독일 남부도시 오버스트도르프의 시 미술관 빌라 야우스(Villa Jauss)에서는 독일에서 보낸 20여년의 작품 60여점들과 고구려벽화를 레퍼렌스로 작업한 신작들을 선보였다. 루퍼츠라는 대가의 수제자인 한국 여성 작가가 오랜동안 독일 문화에 깊숙이 들어와 접합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한국인의 기질을 간직한 채 유럽회화 전통을 넘어 새로운 회화전통을 창조하려는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2024년 폴란드 브로츠와프 정현갤러리에서는 세월호 10주년을 맞아 ’세월 오작교‘라는 대형작품을 통해 한국의 무당들이 산자와 죽은자를 만나게하는 굿의 형식을 회화적으로 시각화 했으며, 2024년 서울 나무아트 갤러리에서[ 호랑이 여자의 이타적 사랑]이라는 전시를 통해 동시대의 전쟁의 참상인 가자 이스라엘 전쟁의 희생자들을 연민하는 주제를 한국 설화 ’김현감호‘에 등장하는 호랑이 여자를 통해 구원해 주고 싶은 강한 연민과 사랑을 작품에 실었다.
+. 오는 2025년 11월 18일 갤러리 마리에서 개최되는[ 우주 호랑이- 호랑이 여자로 산다는 것은] 전시에서 작가는 대구 시월 항쟁이라는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기아 데모‘, 당시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먹일것이 없어서 일으킨 항쟁으로, 그동안 은폐되어 있던 가슴 아픈 폭력과 희생의 한국사를 소재로 동시대의 문제로 소환하여 함께 공감하기를 청하고 있다. 이광 작가는 2025년 가을 대구에서 개최된 [대구 시월이 온다]라는 전시에 참가하기도 했다.
+. 1970년대 베이비붐 시대에 유년기를 보내고 가난과 결핍속에 압축적 성장의 시대를 목격하면서 성장한 작가가 바라보는 동시대의 문제의식은 물질문명과 정신세계의 괴리가 것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남녀의 차별, 빈부의 차별과 A.I 시대의 앞으로 더 소외될 수 밖에 없는 계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어떻게 집단 정체성안에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대화의 장으로 끌어 내올 수 있는지를 예술언어로 심화 시키고 있다. 이에 작가는 불교적 표현을 빌어와 "색불이공".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다르지 않다’라는 메세지속에 작가는 영성의 추구와 미의 추구를 접목하고자 한다.
기자의 글
이광 작가와 인터뷰하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특별한 환경과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힘든 노력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작가의 아픔을 알게됐다. 물론 한 두시간 얘기해서 이해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어쨋든 그의 작품과 그의 인생을 함부로 평(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의 글을 빌려 기사를 작성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은 물론 작가 노트다. 다 읽어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마음 아프로 힘든 글이다. 이런 작가 노트는 처음 봤다. 그만큼 진실하고 가려진 것 없는 날 것, 그대로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모쪼록 발췌된 이 기사의 글을 읽고 이광 작가의 극히 개인적인 서사가 주는 거대한 예술의 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작가와 짧게 인터뷰한 내용을 유튜브에 올릴 예정이다. '미술평론가 김진부'로 유튜브 채널을 검색할 수 있다.
(아트앤비즈=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