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ving Penn Joan Miró (A), Tarragona, Spain, 1948 © The Irving Penn Foundation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2025년 11월 21일부터 2026년 2월 7일까지 카탈루냐(Catalonia) 출신의 거장 호안 미로(Joan Miró, 1893–1983)의 개인전 《조각의 언어》를 개최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국내에 거의 소개된 적 없는 미로의 청동 조각들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집중된 조각 실험을 조명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후기 아상블라주(assemblage) 조각은 미로 특유의 끊임없는 실험 정신이 응결된 결정체로, 일상에서 발견한 사물을 활용해 작가 특유의 조형 언어로 변모시키는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에 대해 예술 평론가이자 시인인 자크 뒤팽(Jacques Dupin)은 “미로 특유의 독창적인 조각적 상상력이 가장 순도 높게 드러난 시기”라고 평했다.
Irving Penn Joan Miró on His House Roof, Tarragona, Spain, 1948 © The Irving Penn Foundatio
나는 정말로 환상적이며 살아 있는 괴상한 것들의 세계를 조각 속에서 창조할 것이다.
— 호안 미로
마요르카(Marjorca) 작업실에서 완성된 일련의 작품들은 민속 예술과 공예품부터 해안 식물과 광물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발레아레스 제도(Balearic islands)에서 수집한 요소들을 담고 있으며, 자연의 요소를 자신만의 고유한 조형 언어로 승화시킨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연대별 미로의 작품 경향
그는 1922년부터 조각 실험을 본격적으로 전개했고, 1930년대 초에는 초현실주의적 작품인 〈구성(Constructions)〉(1930)과 이후 〈시적 오브제(Objets poétiques)〉(1936)를 통해 평면 회화에서 삼차원적 조형으로 영역을 확장했는데, 이 작품에는 박제 앵무새 등 ‘발견된 오브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미로의 독창적인 조형 감각이 서서히 구체화된 시기로 평가된다.
호안 미로, 《조각의 언어》, 전시 전경, 타데우스 로팍 서울, 2025년 11월 21일—2026년 2월 7일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 SACK, Seoul, 2025 사진: 전병
1944년 도예가 조셉 로렌스 아르티가스(Josep Llorens Artigas)와의 협업을 시작한 미로는 1953년 이 관계를 다시 이어가며 본격적인 조각가로 도약했다. 1960년대 이후, 조각은 미로 예술 세계의 핵심으로 자리잡았으며, 특히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에 위치한 매그 재단(Fondation Maeght)에 설치된 장소 특정적 작품 〈미로의 미로(Labyrinth Miró)〉(1964, 1968, 1973)는 그 정점으로 꼽힌다.
과슈 회화 1점 및 초상 사진 2점도 전시
한편, 미로의 초기 과슈 회화 한 점과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가 중 하나인 어빙 펜(Irving Penn, 1917–2009)이 촬영한 미로의 초상 사진 두 점이 함께 전시된다. 미로와 그의 조각 사이의 상호적 관계를 포착한 펜의 사진은 예술가의 존재와 조형 세계가 어떻게 긴밀히 맞닿아 있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호안 미로, 《조각의 언어》, 전시 전경, 타데우스 로팍 서울, 2025년 11월 21일—2026년 2월 7일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 SACK, Seoul, 2025 사진: 전병
갤러리 안쪽 벽면에 어빙 펜이 1948년 촬영한 미로의 초상 사진 두 점 중 하나에서 미로는 스페인 타라고나에 있는 자택 옥상에서 하늘 아래 자신의 조각들과 나란히 서있다. 다른 사진에서는 미로가 유기적 형태의 청동 조각들을 자신의 품에 안은 채, 펜의 렌즈를 꿰뚫듯 응시한다. 사진에 담긴 작은 청동 조각들은 1940년대 미로의 손끝에서 직접 빚어진, 원초적 볼륨감을 지닌 작품들로 그의 창의성과 인간적 따뜻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전시작 다수는 미로가 마요르카 세르트(Sert)의 작업실에서 제작한 조각들로, 섬에서 수집한 자연물와 잡동사니(bric-a-brac)에서 비롯되었다. 나뭇가지, 조약돌, 그리고 마요르카의 전통 민속 도자기 피리인 ‘시우렐(siurells)’까지 그가 택한 소재는 다채롭고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동시에 모두 일상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한국 방문한 미로이 손자 '호안 푼옛 미로'의 회상
미로는 손자 호안 푼옛 미로(Joan Punyet Miró)는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호안 미로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회상했다. “산책할 때 마치 버섯을 찾듯이 일부러 사물을 찾는 건 아니야. 어느 순간 갑자기 쾅! 하고, 마치 자석에 끌리듯, 자연스럽게 눈이 멈춰.”
호안 미로, 《조각의 언어》, 전시 전경, 타데우스 로팍 서울, 2025년 11월 21일—2026년 2월 7일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 SACK, Seoul, 2025 사진: 전병철
그는 이렇게 수집한 오브제들을 작업실 바닥에 흩어 놓고, 본능적으로 조합해 ‘시적 충격(poetic shock)’을 불러일으키는 형태로 배열한 뒤, 이를 청동으로 주조해 시간의 흔적 속에서도 변치 않는 조각으로 완성했다.
‘꿈의 자동기술(oneiric automatism)’을 바탕으로, 미로는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소재에서 고도의 시적 조형을 이끌어냈다. 그의 가까운 친구 호안 프라츠(Joan Prats)가 농담처럼 말했듯, “내가 돌을 집으면 그저 돌이지만, 미로가 돌을 집으면 그것은 곧 ‘미로’ 그 자체가 된다.”
《조각의 언어》는 미로가 자신의 조각 작업을 통해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듯한 거대한 감각’을 다시 환기한다. 한 작품에서는 옷걸이와 대나무, 플라스틱 파편이 곧 공연을 펼칠 듯한 생동감 넘치는 체조 선수로 탈바꿈되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야자나무 그루터기 위에 놓인 합성 고무와 뒤틀린 병 조각들 사이로 토템적 포옹을 나누는 한 쌍의 인물이 된다.
특히나 미로는 각 오브제에 잠재된 ‘영적’ 에너지를 이끌어내어, 겉보기에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물들을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 카탈루냐 특유의 해학, 그리고 그만의 시적 감성이 깃든 조각으로 재탄생시켰다. 갤러리 야외 중정에는 높이 3미터에 달하는 작품 〈여인과 새(Femme et oiseau)〉(1982)가 자리한다.
이 작품은 1962년 도자 조각으로 처음 구상된 것으로, 이듬해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공원(Parc de Joan Miró)에 설치된 22미터 높이의 거대 조각 〈여인과 새(Dona i Ocell)〉(1983)를 앞선 중요한 선행 작품이다. 원시적인 형태와 과장된 성징(性徵)을 지닌 이 추상적 여성상은 구석기 시대 여신상을 연상시키며, 그 위를 장식한 초승달 모양의 새는 미로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지상과 천상 세계 간의 강력한 연결을 상징한다.
타데우스 로팍 전시공간에 조선미학 반영
이번 전시는 미로의 조각이 만들어 내는 ‘몽환적 풍경’을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가 조선 시대의 미학과 문인정신을 반영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비록 미로는 한국을 직접 방문할 기회가 없었지만, 자연에 향한 그의 섬세한 감수성은 전통 한국 미술 전반에 흐르는 자연에 대한 깊은 존중과 공명한다.
“내 조각이 자연의 요소, 나무, 바위, 뿌리, 산, 식물, 꽃과 혼동되기를 바란다”라는 그의 말처럼, 타데우스 로팍 서울의 전시에서는 한옥의 차경(借景) 개념을 반영한 한지 구조물의 열린 틈을 통해 그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자연을 은근하게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미로가 매그 재단에 세운 기념비적 작품 〈미로의 미로〉를 연상시키며 초현실주의가 즐겨 탐구한 ‘미로(maze)’라는 정신적 은유와도 맞닿아 있다. 창과 문 사이로 드러났다 사라지는 미로의 청동 조각들은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풍경처럼 공간과 호흡한다. 카탈루냐 예술가의 애니미즘적 감수성과 한국적 미감이 한데 교차하는 이번 전시는 미로의 급진적 아상블라주 조각이 지닌 영적 본질을 더욱 고양시킨다.
호안 미로 작가 소개
카탈루냐 출신의 현대미술 거장 호안 미로는 189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1983년 마요르카 팔마(Palma)에서 생을 마감했다. 1907년 미로는 바르셀로나 상업학교(Barcelona School of Commerce)와 라 론자 미술학교(La Lonja School of Fine Arts)에 동시에 입학했다.
1911년 장티푸스에 걸린 후, 그는 회계사로서 직업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회화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1912년부터 1915년까지 미로는 프란세스크 갈리 미술학교(Francesc Galí Art School)에 다녔으며, 이 시기 ‘촉각 드로잉(touch-drawing)’ 실험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조각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되었다. 그의 첫 개인전은 1918년 바르셀로나의 달마우 화랑(Galeries Dalmau)에서 열렸다.
초기 회화 작품에서는 야수파(Fauvism)와 폴 세잔(Paul Cézanne), 큐비스트들의 영향이 드러난다. 1920년, 미로는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해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인연을 맺었고, 블로메 거리 45번지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당시 그는 안토닌 아르토(Antonin Artaud), 로베르 데스노(Robert Desnos), 르네 샤르(René Char) 등 전위 시인들과 친교를 쌓으며 그들의 형식적 혁신에 매료되었다. 1924년, 미로는 안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초현실주의 선언(First Manifesto of Surrealism)』에 서명했으며, 이듬해에는 〈꿈의 회화(dream paintings)〉 연작을 시작했다. 범주화될 수 없는 작가였던 미로는 브르통이 그를 “우리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평했음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 그룹에 속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했다. 1927년에는 스스로 “회화를 살해하겠다”고 선언했으며, 1930년대 내내 조각적 오브제와 콜라주, 종이 작품을 실험했다.
스페인 내전(1936–1939) 중 미로는 1937년 파리 국제박람회 스페인관을 위해 벽화 〈Le Faucheur (Paysan Catalan en Révolte)〉를 제작했으며, 이는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와 함께 전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0–1941년 사이 〈별자리(Constellations)〉 연작을 제작했는데, 이는 20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널리 평가받는다.
미로의 첫 회고전은 1941년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 열렸다. 1958년에는 조세프 요렌스 아르티가스와 협업해 제작한 도자기 벽화 〈태양의 벽(Wall of the Sun)〉과 〈달의 벽(Wall of the Moon)〉이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설치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미로는 구겐하임 국제상을 수상했다. 1970년에는 뉴욕 피에르 마티스 화랑(Pierre Matisse Gallery)과 파리 갤러리 매그(Galerie Maeght)에서 미로의 조각 작품을 집중 조명한 최초의 전시가 개최되었다.
이어 1971년 미니애폴리스 워커 아트 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열린 《Miró Sculpture》는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Art Museum)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The Art Institute of Chicago)로 순회되었으며, 1972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는 《Miró Bronzes》가 열렸다.
1973년에는 클로비스 프레보(Clovis Prévost)와 카를레스 산토스(Carles Santos)가 미로를 주제로 한 영화 『Miró sculpteur』를 만들었다. 1978년에는 파리 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Paris)에서 《Miró: 100 Sculptures 1962–1978》이 열렸다. 그의 기념비적 조각인 〈Lune, Soleil et une étoile (Miss Chicago)〉(1981)와 〈Personnage et Oiseaux〉(1982)는 각각 시카고와 휴스턴에 설치되었다.
최근에는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재단(Fundació Joan Miró, 2015–16), 산탄데르 센트로 보틴(Centro Botín, 2018), 헤이그 비엘덴 안 제 미술관 (Museum Beelden aan Zee, 2024–25) 등에서 미로 조각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가 개최되었다.
호안 미로의 작품 소장처
미로의 조각 작품은 전 세계 유수의 기관 소장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기관으로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달라스 내셔 조각 센터(Nasher Sculpture Center),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허시혼 미술관 및 조각 공원(Smithsonian Hirshhorn Museum and Sculpture Garden),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마드리드 국립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재단, 마요르카 필라르와 호안 미로 재단(Fundació Pilar i Joan Miró a Mallorca, Palma de Mallorca),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하우스(Kunsthaus Zürich), 바젤 쿤스트뮤지엄(Kunstmuseum Basel), 일본 하코네 야외미술관(Hakone Open-Air Museum), 요코하마 미술관(Yokohama Museum of Art) 등이 있다.
(아트앤비즈=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