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 2021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이강소/이강소 작업실 사진: 박찬우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강소를 국제적인 주목의 중심에 올려놓았던 퍼포먼스가 50년 만에 파리로 돌아온다."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서울은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타데우스 로팍 파리 마레에서 이강소 작가의 개인전 ⟪煙霞(연하)로 집을 삼고, 風月(풍월)으로 벗을 사마⟫를 연다고 밝혔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강소 작가의 개인전 ⟪煙霞(연하)로 집을 삼고, 風月(풍월)으로 벗을 사마⟫는 살아 있는 닭을 ‘예술가’로 설정한 전위적 퍼포먼스 작업을 중심으로, 같은 해 제작된 삼베 캔버스 회화, 그리고 1970년대 작가의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사진, 영상, 조각 작업들을 함께 선보인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수십 년에 걸쳐 확장되어 온 작가의 예술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주요 회화 작품들도 함께 소개된다. 본 전시는 이강소가 맞이한 결정적인 전환기를 중심으로, 이후 그의 예술 언어가 어떻게 진화하고 확장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이강소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전환점

1970년대, 이강소는 전위적인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실험성과 개념적 시도가 두드러진 그의 작업은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결정적인 기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그는 파리 시립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에서 ⟨무제–75031⟩을 선보였으며, 한 마리 닭을 공동 작가로 등장시킨 이 작업은 파리 현지 미술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석고 가루로 둘러싸인 나무 먹이통에 묶인 닭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전시장 바닥 위에 발자국(흔적)을 남겼고, 이를 통해 작품은 완성되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상징적인 이 작품은 발표 50주년을 맞아 2025년 9월 12일 타데우스 로팍 파리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됐다. 전시 개막일, 닭은 다시 하얀 가루 위를 거닐며 시간의 흔적을 따라 또 한 번 새로운 궤적을 그렸다.

이강소는 1970년대 한국의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 흐름을 대표하는 작가로, 존재와 부재, 시간과 덧없음 같은 비물질적인 개념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이번 전시에 재현된 ⟨무제-75031⟩에서 닭은 전시장 바닥에 흩뿌려진 분필 가루 위를 거닐며 원형의 궤적을 남기고는 사라진다. 관람객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닭 자체가 아니라, 그 흔적만이 남겨진 풍경이다. 이 작업에는 1975년 첫 발표 당시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이 함께 전시되며, 매 설치마다 하나의 구성 요소로 포함된다. 관객은 물질적 흔적과 사진을 단서 삼아, 이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상상하게 되며, 작가의 말처럼 “세상이란 결국 눈에 보이는 것보다 사라진 것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는 작품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한다는 사실, 그리고 나 또한 그 변화의 구조 안에 놓여 있다는 허공 같은 인식 속에서, 나는 세계와 나 자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사유한다." — 이강소

과거 퍼포먼스의 기록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작품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는 ‘덧없음’과 ‘변화’라는 개념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사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1970년대에 그가 시도한 여러 실험적 설치 및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해당 작업들의 기록 자료와 조형 요소들을 통해 퍼포먼스가 촉발한 현존성과 그 흔적을 함께 보여준다. 이는 ⟨페인팅(이벤트 77-2)⟩(1977)의 진행 과정을 담은 흑백 사진 연작에서 또한 잘 드러난다. 작가는 자신의 몸에 물감을 바른 뒤 캔버스 천으로 닦아내는데, 이는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인체측정(Anthropometries)⟩ 연작에 대한 작가적 응답으로 읽힐 수 있다. 당시 사용된 천은 이후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형적 요소로 전환되어, 체험과 존재의 물질적 구현을 드러내는 이른바 ‘촉각적 초상(tactile portrait)’으로 자리매김한다.

"나는 회화를 더 확장된 언어로 만들고 싶었다. 물성을 지니지만, 지워질 수 있고, 보는 이마다 다르게 읽힐 수 있는 형태의 회화말이다." — 이강소

⟨페인팅 78-1⟩(1977)은 이강소가 처음으로 시도한 비디오 작품이자, 회화 행위 자체에 대한 탐구이다. 작가는 카메라 앞에 유리판을 세우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촬영했다. 이 방식은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를 전복하며, 우리는 마치 가상의 캔버스 너머에서 작가의 붓질을 목격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작업이 전개될수록 작가의 신체는 점차 붓질에 가려지며 사라지고, 이를 통해 ‘소멸’의 개념이 시각화된다.

‘소멸’의 주제는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다양한 작업 전반에 걸쳐 관통된다. 특히 ‘선술집’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소멸⟩(1973)의 사진 자료는 이 주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실제 술집에서 사용되던 탁자와 의자를 통째로 매입했던 이강소는 이를 서울의 명동화랑에 옮겨와 전시의 형태로 선보였다. 일주일동안 운영된 이강소의 ‘선술집’에서 관람객은 술집의 구조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이식된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경험할 수 있었다. 얼룩과 흠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일련의 가구들은 단순한 전시 오브제를 넘어,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의미가 어디에 어떻게 축적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1970년대 이강소는 캔버스를 벗어난 실험적 예술 실천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탐구하며 그 형식과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본 전시에 소개되는 1975년에 제작된 두 점의 삼베 회화가 그 대표적인 예로, 작가가 파리 비엔날레 준비를 위해 파리에서 머무르며 제작한 초기 실험 회화 작품이다. 이 시기의 회화 실험은 화면을 구성하는 물질 자체—즉 캔버스—에 대한 해체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평면 회화의 새로운 형식을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 구조부터 들여다봐야 했다”고 회고한다. 실제로 이 회화는 전통 한국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삼베를 구성하는 직조된 실을 하나씩 뽑아내며 완성된 것이다. 실이 제거된 자리에는 당김과 이완, 주름과 틈이 생기며, 화면 자체가 회화 행위의 결과이자 그 행위의 주체로 존재하게 된다. 이강소는 당시를 회상하며 “캔버스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물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회화 실험은 한국 현대회화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의 범주를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이후 이강소는 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로 관심을 옮기며 그가 마주하는 풍경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사슴, 오리 그리고 배와 같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도상을 중심으로, 절제된 붓질을 통해 형상화된다. 작가가 주변 자연에서 길어 올린 관찰과 사유는 기억과 체험에 뿌리내린 몸짓으로 이어지며 화면 위에 응축된다. 1990년대를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도상은 점차 해체되고 흩어지며, 점점 더 단순화되고 충동적으로 그려지는 형태 속에서 서예적인 필획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는 자연 세계에 내재된 형언할 수 없는 힘들에 대한 작가의 예민한 감각, 그리고 점점 더 깊어지는 감응의 태도를 반영한다. 본 전시의 제목은 16세기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이 안동 도산서원에서 머물며 쓴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사마” 이는 인간이 자연 속에 스며들어 존재의 본질을 되묻고, 자아를 우주적 질서와 조화시키려는 시인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긴 구절이다. 이강소는 이러한 퇴계의 자연관에 깊이 공명하며, 자신의 예술 또한 자아를 주장하거나 고정된 실체를 구축하기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세계의 흐름과 조응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파리 전시 소개 작품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모두 프랑스에 위치한 생테티엔 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et Contemporain de Saint-Étienne Métropole)에서 2016년 열린 이강소의 개인전을 기획했던 전(前) 관장 로랑 헤기(Lóránd Hegyi)의 말처럼, “우주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묻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1975년 파리 비엔날레 출품 당시 이강소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와 관계를 드러내는 열린 구조를 제시하고자 했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넘어, 우주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상태들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퍼포먼스에서는 스스로를 지우고, 회화에서는 형태를 비물질적 세계로 흩어지게 하며, 이강소는 작가의 권위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객관적 실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예술이란 관람자가 자신의 지각과 감응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공명(共鳴)의 공간’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이수연 학예사는 이를 두고 “이강소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오히려 관람자가 작품을 완성하도록 초대한다.”라고 덧붙였다.

타데우스 로팍 파리 마레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25년 9월 9일에 개막하는 대구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과 맞물려 개최된다. 이는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개인전에 이어지는 전시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다층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

타데우스 로팍 파리 마레에서 재현된 ⟨무제-75031⟩에 함께한 닭은 유럽 내 동물 배우 전문 에이전시를 통해 섭외된 닭으로, 동물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여 안전하고 적절한 환경에서 전문 관계자의 관리와 보호 아래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습니다.

작가 소개

이강소는 현재 대한민국 경기도 안성에서 거주하며 작업한다. 1965년 서울대학교 회화과 졸업 이후 수십 년간 다양한 전위적 예술 운동에 참여해 왔으며, 1970년 당시 주류를 이루던 화단에 반기를 든 예술가들이 모여 결성한 ‘신체제’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는 도심 외곽의 지역 예술 활동을 육성하는 데 크게 힘썼다. 1985년부터 국립 경상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작가는 이듬해 미국 알바니 소재의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객원 교수 겸 객원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뉴욕 현대 미술 연구소(MoMA PS1)에서 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Studio Artists Program)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했다. 작가는 이렇듯 다양한 국제적 경험을 통해 폭넓은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으며, 일본의 모노하, 한국의 실험미술, 미국의 미니멀리즘,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와 같은 다양한 전위적 예술이 펼쳐지는 세계를 무대로 작가 특유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발전시키고 지속적으로 확장해왔다.

이강소는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폭넓게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은 그의 작품 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중요한 회고전을 개최했다. 2023년부터 2024년에는 이강소의 작품이 동시대 작가의 작품들과 함께 《한국 실험 미술 1960-70년대》라는 주요 순회 전시에서 소개되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최 후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과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Hammer Museum, Los Angeles)에서 소개되었다.

또한 그는 대구미술관에서 개최된 다수의 전시(2021, 2020, 2018, 2011)에 참여했으며, 이외에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2019), 생테티엔 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et contemporain de Saint-Étienne Métropole, 2016), 테이트 모던(Tate Modern, London, 2012–13), 아시아미술관(Musée des Arts Asiatiques, Nice, 2006), 선재미술관(2003), 중국미술관(National Art Museum of China, Beijing, 1995),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1992), 바비칸 센터(Barbican, London, 1992), 브루클린 미술관(Brooklyn Museum, New York, 1981),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 Sydney, 1976), 파리 국립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1975)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전시에 참여하였다.

이강소의 작품은 우양미술관(경주), 대구미술관(대구), 미에 현립 미술관(미에현, 일본), 국립현대미술관(과천),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런던, 영국), 리튼아트파운데이션(프랑크푸르트, 독일)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ART&BIZ= 김진부 기자)